2024년 12월.
잠이 오지 않는 날들의 연속이다.
12월 3일 밤.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비상계엄'이라는 단어를 보았고, 그로부터 몇 분 후 굉음을 내는 헬기 소리에 창문을 열었을 때 헬기 2대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아닌 밤 중에 헬기들이 날아가는 곳은 국회 앞마당이었다는 것을 직후에 확인할 수 있었다.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다듬고 실시간 진행상황을 살폈다.
'계엄해제안'이 가결되는 것을 확인하고도 바로 잠들 수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12월 10일.
자정을 기해 한강작가의 시상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스웨덴 시상식장 중계 영상을 보며 시간은 다음 날 새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시상식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시상을 하기 전에 사회자가 읽어주는 심사평은 그대로 한편의 문학작품을 방불케 했다. 작가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가치와 그것을 작품 속에 어떻게 녹여냈는지를 섬세하게 그리고 문학적으로 소개해 주었다.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을 통해 한강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지만, 그녀의 다른 작품인 '채식주의자'는 읽지 않았다. 주변 몇몇 지인들의 부정적인 평이 있었기 때문인데, 고백하건데 '소년이 온다'를 통해 갖고 있던 한강 작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사라질까 지레 겁을 먹었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심사평을 듣고 난 후 '채식주의자'가 읽고 싶어졌다.
사전에 진행되었다던 수상 소감에서 그녀는 아주 일상적인 말들로 그녀가 작가 인생을 시작하고 천착했던 화두에 대해 담담하게 말해 주었다. 전율하게 만들었던 책 속의 한 문장이, 너무도 참혹해서 눈물짓게 했던 책 속의 주인공의 생애가 어떤 마음으로 탄생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광주민주항쟁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해 구술사 900개를 매일 9시간씩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설 속 장면과 인물들이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다. 이제는 주검이 되어 말할 수 없는 인물들이 육신과 육성으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영혼으로 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은 왜 이토록 잔인한가? 또 사람은 왜 이토록 아름다운가?'
그녀가 천착했던 화두를 듣자 작금의 상황이 오버랩되는 것 같았다.
12월 3일 국회를 점령하려 굉음을 내며 날아가던 헬기 소리,
12월 10일 노벨상 시상식장에서 울려 퍼졌던 아름다운 선율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하 한강 작가 수상 소감 전문-
폐하, 왕실 전하, 신사 숙녀 여러분.
제가 여덟 살이던 날을 기억합니다. 오후 주산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비가 너무 세차게 내리자 20여 명의 아이들이 건물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길 건너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처마 밑에 또 다른 작은 군중이 보였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제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저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이 모든 사람들, 그리고 건너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요. 저와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 이 비를 보고 있었습니다. 제 얼굴에 촉촉이 젖은 비를 그들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1인칭 시점을 경험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쓰면서 보낸 시간을 되돌아보니 이 경이로운 순간이 몇 번이고 되살아났습니다. 언어의 실을 따라 또 다른 마음 속 깊이로 들어가 또 다른 내면과의 만남.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질문을 실에 매달아 다른 자아에게 보내는 것. 그 실을 믿고 다른 자아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 이러한 질문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져온 질문이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묻는 언어, 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과 생명체의 일인칭 시점으로 상상하는 언어, 우리를 서로 연결해주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지니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문학을 위한 이 상이 주는 의미를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