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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송희 Jan 10. 2021

[독서감상] 철학자와 하녀, 고병권

 


 나 역시 인간인지라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한다. 먹을것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가난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했던 적이 여럿 있다. 지금에야 가난함은 조금 불편한 것임을 안다. (그 이상의 의미부여는 정신건강에 해롭다) 하지만 예민했던 학창시절에는 가난이 가슴의 멍에가 되어 부모님을 원망하고 더 잘나지 못한 나를 한스러워 했었다. 이 책은 이따금씩 부족함 때문에 초조함과 불안함을 느끼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깨달음과 지혜를 선사할 것이다.


 요즘 같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두가 힘들 때에는 더욱이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철학(철학적 행동)이란 내가 알고 있는걸 정당화 시키는게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그 자체라고 말한다. 시간은 나이와 비례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먹고 사느라 바뻐, 익숙한 회사의 일이 내 삶의 전부인양 살아간다.


 실은 일 자체가 내가 원하는 삶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고, 이해하며 배워가는 것. 지금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해보는 것이 자신의 도량을 넓히는 것이고 철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내용 자체를 따지고 보자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를 위한 철학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은 어려웠다. 작가님이 글에 기울인 노력이 느껴졌지만 조금 더 쉽게 쓰여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상대적 비교의 위험성

 우여곡절이 많았던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난히 비참했던 과거의 역사를 현재와 비교하며 과거를 평가하거나 현재를 진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작가 역시 "전근대적"이란 표현 또한 현재의 치부를 과거 사회에 책임지우는 우리 시대의 못된 습관이라고 말했다. 나는 애초에 상대평가를 싫어한다. 똑같은 성적을 가지고 있는 두 학생이 공부 잘하는 집단에서 낮은 평가를 받고 공부 못하는 집단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형평성에 모순이 있는 것 같다. 회사원들은 보통 회사 동료들과 가족들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하고 생활하며 그들과 나를 쉽게 비교하게 된다. 상대가 못나게 느껴진다고 내가 잘난 사람이 아니며, 상대가 잘나게 느껴진다고 내가 못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나는 어디에서든 빛나는 절대적 가치의 사람이고, 발전해나간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소한 것의 중요성 

 살아보면 중요해보이는 일들의 종류에는 상관의 지시를 따라 일을 진행하고, 4년 공부 끝에 학위를 따고, 부동산 매매를 계약하는 이벤트 등이 있다. 그리고 사소한 것에는 내가 태어난 고향의 풍토, 자신의 독서법, 자신의 음악취향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사소한 것들은 쉽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소한 사항들은 이제껏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졌던 것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여기서 바로 다시 배우는 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작가는 이런 것이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이고 '가치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너무 당연하고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한 것들, 작은 소망을 이루는 것이 모순일 수 있지만 큰 일을 하는 것보다 중요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수용소

  예전에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위를 일삼던 시설 형제복지원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처음 접한 것은 '그것이 알고싶다'에서였다.  복지원에서는 '이유없는' 폭행과 노동강요가 자행되었고, 권력이 절대적으로 되어갈수록 그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시설에 수용될 때 수용자들은 사실상 모든 사회성, 다시 말해 모든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권리를 박탈 당한다.

  예전에 뉴스로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는데, 요양원에서 할머니의 발작을 태연하게 지켜보았던 요양원 직원의 행동이 CCTV로 그대로 찍혔고, 결국 적절한 응급 조치를 받지 못한 할머님이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직원은 그곳에서 절대 권력자가 된 것이다. 이게 단지 그 직원의 잘못일까?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감시할 수 있는 감시체계가 마비되었고, 그들을 방관하는 시민들의 무관심이 이 사건을 촉발시켰다.

나같이 일반적인 사람들 역시 그 권력이 느슨한 시설 사회에 살고 있다. 비극을 막기위해서는 시민 하나하나가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역할이 되어야 한다. 


해석노동은 하급자가 아니라 상급자가

사회적 약자들은 어떤 상황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권력을 가진 자의 눈으로 보려고 한다. 어짜피 상황은 권력자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이를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해석노동'이라고 불렀다. 더욱이 이런 경향은 가부장제 사회일수록 크다고 한다. 남녀에게 성별을 바꾸어 서로의 일상에 기술해보라고 하면 여성은 남성의 일상을 자세히 적는 한편 남성은 여성이 하는 일 자체에 대해 별 개념이 없는 답변을 한다고 한다. 

작가는 말했다.

 "해석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지위가 낮다고 그 노동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며,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노력은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이다.
이는 사람이 사람을 기르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절대적 전제이다.  

상급자가 하급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점장이 종업원의 마음을 헤아리고,
교사가 학생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다시말해 권력자가 인간관계에서 해석학적 노동을 수행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나 역시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업무에 관심과 열의없이 일하는 상사 밑에서 열심히 해석 노동을 수행하는 아래 직원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아래 직원의 입장을 고려하고 열과 성의를 다하는 상사와 열심히 해석 노동하는 아래 직원을 통해 시너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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