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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운서 Mar 23. 2022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창조의 섭리.


“사람은 안 좋은 일을 기억은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일에 대한 감정은 서서히 무뎌져 가요. 그래야만 사람이 살 수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창조의 섭리인 거죠.”     


한 목사님의 설교였다. 비기독교인들은 창조의 섭리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할 거고 기독교인들은 저 말 자체가 성경적이냐로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뒷부분이 아니라 앞부분에 집중해 본다면, 사람이 안 좋은 일을 ‘기억’은 하지만 그 일에 대한 ‘감정’은 점차 무뎌져 간다는 것에 대해서는 끄덕거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당시에는 너무나 힘들고 끔찍하다고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서 돌이켜 보면 그 아픔까지 그대로 떠오르지는 않으니까. 상처의 정도와 시간이 얼마나 흘렀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분명 아픔은 희석되어 가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 마음 아픈 일이 있더라도, 어디 하나 의지할 데 없더라도 이 하나의 생각은 의지할 만한 것 같다. 결국 이 아픔은 무뎌질 것이라고.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그런데 재밌는 건 감정만 희석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기억 자체도 조금씩 조금씩 흐려져 간다.     


왜 정규직 아나운서를 그만뒀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지역사였다 하더라도 300대 1의 경쟁률을 뚫었고 내 발로 나오지 않았다면 퇴직할 때까지 별 걱정 없이 방송하며 살 수 있는 자리였다. 일의 강도나 연봉도 분명 괜찮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컸어서요.”라고 대답을 한다. 평생 아나운서 꿈을 꿨고 그렇게 이룬 꿈이 생각과는 달랐다고. 그런데 그 한 마디로 정리해버리기에는 내가 그 방송국을 나온 이유가 너무나 많았다.     


카톡방을 찾아봤다. 사직서를 쓸 때 가장 친한 친구들이 있는 방에 혹시나 내가 조금 지나서 그만두려고 한 결심이 흔들린다면, 또는 그만두고 나서 후회한다면 말을 해달라며 ‘사직서에는 쓸 수 없는 솔직한 사직 이유 열한 가지’라는 거창한 글을 하나 써놨었다. 그런데 웃긴 건 내가 그 열한 가지 이유 중 지금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이유는 세 가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나만 있어도 심각한 문제라고 할 이유들이 열한 개나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 내 머릿속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힘들었던 감정도, 심지어 힘들었던 기억까지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진다. ‘시간’이 살면서 참 무심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은데 가끔은 이렇게 우리 편이 돼주기도 한다는 게 위로가 된다.      


그렇기에 오늘도 다시금 새겨봐야지. 나의 힘든 이 마음도, 결코 잊히지 않을 상처까지도... 그것이 인간을 사랑한 신의 섭리이든 아니든 어쨌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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