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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라니바람 Mar 10. 2020

#10. 홈오피스 꾸미다 현실 자각한 프리랜서의 푸념

<지방대 박사 생존기>



3월부터 이런저런 일들이 예정되어 있어서 한가로움은 조금 사라졌다. 그래도 개강이 미뤄져서 2주 동안은 여유가 있었는데, 3월 중에 경쟁 입찰에 참여해야하는 연구용역이 있어서 지금은 제안서를 쓰느라 바쁘다. 특강도 하나 잡혀서 그것도 준비해야한다.     


일을 하거나 책을 볼 때 카페를 잘 가지 않고 집에서 작업 하는 나의 성격상, 이제는 노트북 하나로 버티기 어려운 시기가 왔다. 작년에 이사를 하면서 거실서재의 로망을 이루기 위해 1600사이즈의 책상을 구입해 노트북을 놓고 사용했는데 더 이상 충분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특히 연구 제안서를 작성할 때는 듀얼 모니터가 필수다.      


그래서 마련한 모니터. 내가 고르지도 않고, 돈을 내지도 않았는데 연구팀에서 알아서 검색도 구매도 해서 고맙게도 집까지 배달해주셨다. LG 모니터이다. 화면을 세로로 설정하면 그나마 압도적인 느낌이 덜하지만, 받침대까지 보면 이 모니터 굉장히 크다. 1600짜리 책상에서도 소화가 안 되는 크기여서 800짜리 컴퓨터 책상을 곧 다가올 생일선물로 친구에게 미리 받기에 이르렀다.      


삶에는 업그레이드는 있어도 다운그레이드는 없다더니. 미니멀리스트를 추구해온 내 삶이었건만, 홈오피스를 구축하면서 산산조각 났다. 기존 책상과 ‘ㄱ’자로 배치해서 한쪽에는 노트북과 모니터를, 한쪽에는 책과 기타 잡동사니를 두고, 또 다른 한쪽은 비워두고 식탁으로 사용한다. 공간은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더니, 어제부터 이렇게 두고 쓰는데 정말 편하다. 더 큰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홈오피스 업그레이드에 지대한 공을 세운 경쟁 입찰을 준비 중인 연구용역은 꽤나 머리가 아프지만, 꼭 성사시켜야하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좋은 모니터를 받고서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다면 연구팀에게 미안한 일이니까. 친구가 이사 선물로 사준 프린터기와 함께 이제 어느 정도는 완전한 홈오피스가 완성 되서 기분이 좋다.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취업준비는 하지 않고

홈오피스 꾸미기에 열중하는 이상한 나를 발견하고 있다

도대체 넌 뭘 하고 싶은 거니?

    

어제 홈오피스를 열심히, 아주 예쁘게 꾸미고 온갖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난 뒤 문득 현실자각의 시간이 왔다. 취업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집안 사무실 꾸미기에 집중하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진정 프리랜서가 내 꿈이었던 건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프리랜서에 대한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다. 자유롭게 나만의 시간을 활용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일들을 처리하면서 여유롭게 카페에서 일하는 그런 모습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9시-6시에 활동하는데 익숙해졌고, 큰 일이 없다면 이 시간을 지키며 일하고 쉬려고 노력해왔다. 이번처럼 유난히 일이 몰리거나 바쁠 때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일이 없으면 자유롭게 쉰다는 점에서는 환상에 부합하지만, 이런 경우 자유는 수입의 감소와 직결되므로 썩 유쾌하게 여겨지지만도 않을 거다.      


프리랜서=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 직장인=마지못해 다니는 사람.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엄청나게 능력 있는 프리랜서가 된다면 이 도식이 성립할 수도 있겠지만, 난 아직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심지어 들어오는 일은 일단 무조건 한다는 올해의 목표로 보면 절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는 프리랜서가 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오늘 연구회의를 하고 나오면서 나의 박사학위논문 주제나 관심사와도 크게 관계없는 이 연구의 책임자를 맡아서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게 벅차다는 느낌이 들었다. 프리랜서가 된다고 해서 당장 내가 원하는 일만을 할 수는 없고,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게으르게 살겠다는 2020년의 목표를 떠올리면 한 편으로는 괜히 참여했다는 미묘한 후회도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싶은 인간인걸까’라는 회의적인 생각도 들었다. 이것도 마음에 안 들고, 저것도 마음에 안 들고. 어떤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을까.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는 성숙한 인격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 걸까.  

    

무엇을 하고 살든, 각자 감수해야하는 고통의 총량은 항상 정해져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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