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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덕 Mar 08. 2020

아싸를 위한 공놀이는 어디에

스쿼시는 즐겁다. 스쿼시는.



  문득, 2000년대 초반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남자 주인공은 영앤리치앤핸섬. 직업은 대기업의 실장. 당연히 그를 질투하는 경쟁자가 있고, 당연히 그와 다투다 정이 드는 여자 주인공이 있다. 그를 노리는 모략으로 남자의 미간에는 주름이 지고, 꼬이는 연애로 주름은 더 깊어진다. 카메라는 남자의 찡그린 표정을 클로즈업하다가 스포츠센터로 화면을 전환한다. 남자는 홀로 스쿼시를 하고 있다. 강하게 공을 날리고, 받아친다. 팡팡 터지는 소리와 땀으로 범벅이 된 조각 같은 얼굴. 달아올라 꾸물거리는 근육. 주인공의 내적 고민을 드러내며, 수트에 감춰진 야성미를 함께 표현하는 시퀀스였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른 까닭은, ‘혼자’ 벽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운동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고, 몇 주째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의 고민 회로는 다음과 같다.


▶ '운동하고 싶다' 

▶ '달리기나 헬스는 재미없는데...' 

▶ '구기운동이 좋지. 재미있고, 운동도 되고' 

▶ '농구든 축구든 테니스든 사람들과 부대껴야 되는데... 부담스러운데...'


  아싸라고 공놀이의 즐거움을 모르겠는가. 공 하나를 던져주면 흥에 겨워 폴짝 뛰고 꼬리를 흔드는 모습은 강아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싸도 사람이고, 사람은 짐승인지라 내 몸에도 공을 쫒는 즐거움이 새겨져 있다. 다만, 아싸는 캐치볼을 할 친구가 없고, 싫다는 친구를 테니스장에 끌고 갈 추진력이 없고, 공놀이를 좋아하는 사람과 어울릴 깜냥이 안 될 뿐. 좌절하던 차에 불현듯, 2000년대 드라마의 스쿼시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 이거야. 혼자의 공놀이.


  회사 근처 스쿼시 센터의 이름은 ㄹ발음이 많이 들어가는 프랑스 지명이었다. 아침 8시 ‘강습’이어서 걱정되었으나, 나는 고상하고 품격 있는 이름을 믿었다. 이름이 ‘주말조기축구모임’이라면, 테스토스테론 넘치는 남자들이 몸을 부비며 으쌰으쌰 형님동생하는 모임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저절로 혀를 굴리게 되는 센터 이름은 ‘걱정 마. 유러피안 스타일이야. 각자의 패턴을 존중해줄게.’라고 말하는 듯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센터에 들어섰을 때

  내가 마주한 건, 

  어마어마한 눈곱이었다.

  20여 명. 대략 40개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트 앞 대기실은 좁아서 모두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대부분 세수를 하지 않아 부스스했고 눈곱이 드글드글했다. (운동하고서 씻을 생각들이리라.) 반쯤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는 고수의 포스가 넘쳐났다. 나를 훑어보는 그의 눈빛은 ‘훗, 또 애송이인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다른 이들은 나를 흘끔 쳐다보고서 둘셋 씩 무리 지어 조잘댔다. 여느 조기운동모임과 다를 것 없는 눈곱 회동이었다. 나도 그들에겐 한낮 초보 눈곱이었으리라. 

  선생님이 등장하고, 다 같이 팔 벌려 높이뛰기 20회를 하고서, 스쿼시센터 내부를 줄지어 빙빙 10바퀴쯤 돌고, 선생님의 구령에 맞추어 기합을 내지르며 라켓을 휘둘렀다. 나는 찜찜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동작을 따라 했다. 내가 제대로 찾아온 걸까.


  몇 주가 지났다. 스쿼시는 즐거웠다. 공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강아지처럼 발발발 쫓아간다. 라켓을 휘둘러 공을 정확히 맞추면, 공은 쭉 뻗어나가 벽을 때리며 팡!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낸다. 허파의 한계치를 쥐어짜고 땀을 흘려보낸다. 기분은 상쾌했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반쯤 대머리 고수님은 초등학교 교실만 한 코트를 단 두 걸음으로 커버하는 보법을 일러주었다. 다른 고수님은 라켓 파지법을 가르쳐주었다. 스쿼시‘는’ 즐거웠다.

  문제는 40개의 눈이었다. 사람은 스무 명인데 코트는 두 개였다. 준비운동이 끝나면 수준에 맞게 단식 혹은 복식으로 스쿼시를 치는데, 나머지는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아침바람에 눈곱도 안 뗐는데 저희들끼리 스몰토크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허우적대다 바닥을 두 바퀴 구르는 내 모습을 굳이 지켜보고 싶을까. 할 게 없으니 보는 거지.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이해만 한다. 즐거움은 크고, 체력은 늘어가는데, 정신체력은 소모되고 있었다. 


  3개월쯤 강습을 하던 어느 날, 드디어 그날이 왔다. 

  통합 주말 단체모임 겸 회식. 

  가기는 싫지만, 안 가면 소외될 것만 같은 마음. 우물쭈물하다가 알겠다고 말을 해버려 물리기도 애매한 상황. 

  아아. 역시나, 무수한 낯선 사람들. 아아. 어색한 인사. 아아. 낯선 사람들과의 상호평가. 자세를 좀 더 낮춰야 돼. 영혼 나간 리액션. 우와 대단하시네요. 아아. 낯선 사람들과의 술자리. 아아. 단합. 아아. 파이팅. 아아. 구호. 아아. 예전에 다녔다는 분들의 합석. 아아. 멋쩍은 인사. 아아. 의기투합. 아아. 소외감. 아아.

  영앤리치앤핸섬앤고독한 스쿼시 생활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자기변호를 하자면,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많은 낯선 사람들과 있을 때 급 피로해질 뿐이다.)


  그렇게 나의 공놀이 도전은 막을 내렸고, 하나 깨달았다. 홀로 구기운동을 필요하기 위해 중요한 요소는 영앤리치앤핸섬 중에 리치였다. 개인강습을 받고, 새벽시간에 스쿼시장 전세를 낼 수 있는 재력이 되어야만 아싸의 자아를 유지하며 구기운동을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고, 혹시나 하고 도전했지만 역시나 하고 실패했다. 무엇이 남았나. 밑창이 닳지 않은 스쿼시 신발과 강사에게 홀려서 산 중고 라켓이 남았다. 그 외에 남은 게 있다면, 내 안에 있는 공놀이를 좋아하는 아이와 낯선 이들을 부담스러워하는 아이의 존재를 새삼 재확인했다는 것.

  공놀이를 좋아하는 아이와 낯선 상황을 부담스러워하는 아이는 반목한다. 서로 부딪치는 성향인데 한 몸에 살고 있어서 어떻게 해줘도 한쪽은 심통이 난다. 어쩌겠는가. 도전하고 실패하고 회피하며 밸런스를 찾아가는 수밖에.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흔들리며 계속 균형을 잡아가는 수밖에. 그렇게 비틀비틀 좌우로 흔들리며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으로 더 실패해나간다. 아, 공놀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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