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가 깊어가던 시간이었다.
유치원 앞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엄마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수아의 얼굴은 구름처럼 어두웠다.
삼촌과 김군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본 수아는 평소처럼 뛰어오지 않았다. 대신 터벅터벅 걸어왔다. 발걸음이 무거운 짐을 끌고 가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삼촌이 무릎을 굽혀 수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수아의 눈가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병철이가..."
수아는 말끝을 흐렸다.
"뭐라고 했는데?"
"수아는 아빠도 없잖아... 라고 했어."
삼촌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김군이 수아 옆으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다리에 몸을 비볐다. '괜찮아' 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나는...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그런데 우석이가 병철이한테 바보라고 했어."
수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우석이가 수아 편을 들어준 거구나."
"응... 근데 병철이 말이 맞잖아. 수아는 정말 아빠가 없어."
삼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아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김군이 그 옆을 조용히 따라왔다.
공원까지는 멀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수아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질문을 퍼부었을 텐데, 오늘은 조용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궁금증이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았다.
공원 벤치에 도착했을 때, 하늘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석양이 구름 사이로 스며들어 하늘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세 명이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수아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삼촌."
"응?"
"왜 아빠는 하늘에 갔어?"
삼촌도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점점 더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수아야."
"응?"
"저녁이 되면 하늘이 빨갛게 불타지?"
"응!"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하늘이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아빠는 소방관이잖아. 하늘에서 불을 꺼줄 사람이 필요했어. 그래서 특별채용 해 갔어."
"특별채용?"
"응. 하늘이 매일 저렇게 불타는데, 누군가는 꺼줘야 하잖아. 그래서 특별히 모시고 간거지."
"그럼 아빠가 하늘에서 불을 끄고 있어?"
"그럼. 매일 저녁마다. 그래서 밤이 되면 하늘이 까맣게 되는 거야. 아빠가 다 꺼주니까."
김군이 꼬리를 한 번 흔들었다.
수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수아도 아빠가 필요하잖아."
삼촌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더욱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수아가 아빠를 다시 만날 때까지 삼촌이 아빠 역할을 해주라고 했어."
"아빠가?"
"응. 아빠가 특별채용 돼서 올라가기 전에 삼촌한테 말했어. '수아를 잘 부탁한다'고."
수아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
"정말. 그래서 삼촌이 수아랑 매일 산책하고, 질문에 대답해주고, 함께 있어주는 거야."
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우리가 팀인 거야' 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병철이가 '아빠 없다'고 할 때 뭐라고 하면 돼?"
삼촌이 수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우리 아빠는 하늘소방관이야. 매일매일 하늘의 불을 끄고 있어' 라고 하면 돼."
"매일매일 불 만 끄고 있어?"
"매일 저녁 하늘의 불을 꺼주고, 밤에는 별들을 정리하고, 아침에는 해가 잘 떠오르게 밀어줘."
수아는 하늘을 다시 올려다봤다. '불을 끄고... 별을 정리하고... 해를 밀어주는 아빠.'
"아빠가 수아도 볼 수 있어?"
"그럼. 수아가 유치원에서 뭐했는지, 누구랑 놀았는지, 다 보고 계셔."
"병철이가 놀린 것도?"
"그것도. 아마 아빠가 병철이 꿈이 나타나서 혼내 주실거야."
수아가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빠! 수아는 괜찮아요! 병철이 혼내지 않아도요!"
"그래?"
"아빠! 수아는 삼촌하고 김군이 있어서 괜찮아요!"
김군이 그 순간 일어나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짧게 "야옹" 하고 울었다. 마치 "우리는 한 팀이니까." 하는 것 같았다.
석양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하늘의 빨간색이 주황색으로, 주황색이 보라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저기 봐, 아빠가 불을 거의 다 꺼가고 있어."
삼촌이 하늘을 가리켰다.
"우와... 정말 불이 꺼지고 있어!"
수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좀 전의 어두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삼촌."
"응?"
"내일 병철이가 또 그런 말 하면, 수아가 자랑할 거야. 우리 아빠는 하늘 소방관이라고!"
김군이 꼬리를 높이 들고 걸어갔다. '이제 집에 가자' 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수아는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첫 별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삼촌, 아빠가 별을 정리하고 있어!"
"그럼. 아빠가 하나하나 닦아서 반짝반짝하게 만들어 주시는 거지."
"김군도 하늘에 가면 아빠 만날 수 있을까?"
김군이 뒤돌아보며 꼬리를 한 번 흔들었다. '언젠가는' 하는 표정이었다.
그날 밤, 수아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봤다. 별들이 정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빠, 오늘도 수고했어요. 내일도 하늘 잘 부탁해요!"
수아가 인사하자,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마치 "알았다" 하는 대답 같았다.
김군이 침대 발치에서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오늘도 좋은 하루였다는 듯이.
수아는 더 이상 아빠가 없다고 슬퍼하지 않았다. 아빠는 하늘에서 매일 일하고 계시고, 자신을 지켜보고 계시니까. 그리고 삼촌과 김군이 함께 있으니까.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었다.
"아빠의 사랑은 하늘만큼 크다는 걸 배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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