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심화편
“작가는 신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알되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신.”
라이언 스톤, 루이즈 뱅크스, 밀드레드 헤이즈. 세 여성의 이야기를 신의 시점으로 서술한다면 어떨까?
그들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알고,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내면의 갈등까지 들여다보며, 심지어 그들 주변 인물들의 숨겨진 동기와 상황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다면 어떨까?
전지적 시점은 바로 이런 신의 권력을 작가에게 부여한다. 하지만 신의 권력은 양날의 검이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관객에게는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만큼 공개해야 한다는 책임.
모성 서사를 다룬 세 작품이 1인칭이나 3인칭 관찰자가 아닌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된다면, 어떤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가 펼쳐질까?
"전지적 시점의 가장 큰 특징은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 는 것이다."
『그래비티』
라이언이 우주에서 회전하는 이 순간, 지상에서는 휴스턴 관제센터의 직원들이 절망적으로 통신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사고가 단순한 기술적 실패가 아니라, 냉전시대의 유산이 21세기에 돌려준 복수라는 것을. 러시아 정부는 이미 3시간 전에 위성 폭파 결정을 내렸고, 그 파편들이 연쇄반응을 일으킬 것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언은 그 어떤 것도 모른 채, 4년 전 죽은 딸 사라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엄마, 하늘에 가면 아빠를 만날 수 있어?”*
이런 서술이 가능한 것은 전지적 화자가 모든 시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지적 시점에서만 가능한 것이 있다. 바로 '극적 아이러니의 완벽한 설계' 다."
『컨택트』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우면서 자신이 미래를 보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가 ‘기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예견’이라는 것을. 그녀의 뇌는 이미 선형적 시간 인식을 벗어나고 있었지만, 그녀의 의식은 여전히 과거의 경험으로 해석하려 애쓰고 있었다. 한편 전세계 12개 지점에 도착한 헵타포드들은 루이즈라는 개체를 선택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만이 언어를 도구가 아닌 인식의 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3000년 후 그들이 인간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독자는 루이즈보다 더 많이 알게 되고, 동시에 헵타포드보다는 적게 안다. 이런 정교한 정보 조절이 전지적 시점의 묘미다.
"쓰리빌보드의 주인공 분노를 세 시점으로 비교해보자."
1인칭: "나는 화가 났다. 이 빌어먹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내 딸을 잊어버렸다."
3인칭 관찰자: "밀드레드가 주먹을 쥔다. 그녀의 턱선이 단단해진다. 광고판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에 무언가 위험한 것이 번뜩인다."
전지적 시점: "밀드레드의 분노는 정당했다. 하지만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윌러비 서장은 이미 암 3기 진단을 받은 후였고, 그 때문에 수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딕슨 경찰관은 겉으로는 무능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안젤라 사건과 유사한 다른 범죄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침묵도 무관심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 진짜 범인이 아직 그들 사이에 숨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3인칭 관찰자는 행동만 보여줄 수 있고, 1인칭은 한 사람의 내면만 들여다볼 수 있다. 하지만 전지적 시점은 '모든 인물의 복합적 심리상태를 동시에 드러낼 수 있다'.
영화 '그래비티' 의 주인공 라이언이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때, 맷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감지했다. 그는 평생 우주비행사로 살면서 터득한 직감으로, 라이언이 단순히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이유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는 묻지 않았다. 자신도 한때 같은 상황이었다는 것을, 첫 번째 결혼이 파탄났을 때 우주가 유일한 도피처였다는 것을 라이언이 알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고통을 알아보았지만, 둘 다 그것을 언급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들에게는 침묵이 유일한 위로였다.
"전지적 시점의 압도적 장점"
『컨택트』
루이즈는 선택한다고 생각했다. 이안과 결혼하기로, 한나를 낳기로, 딸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기로. 하지만 헵타포드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루이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그녀의 뇌가 헵타포드 언어에 노출되는 순간, 그녀의 시간 인식은 이미 비선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그 변화는 되돌릴 수 없었다. 자유의지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이미 결정된 미래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이즈에게는 그것이 선택으로 느껴졌고, 그 느낌 자체가 인간다움의 핵심이었다.
『쓰리빌보드』
밀드레드의 광고판이 세워진 그 주, 이 작은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재편이 일어나고 있었다. 시장은 재선을 위해 법과 질서를 강조해야 했고, 윌러비 서장의 질병은 경찰서 내부의 파벌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딕슨의 어머니는 아들의 폭력성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남편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마을의 침묵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복잡한 이해관계의 산물이었다. 모두가 안젤라 사건의 진상을 원했지만, 동시에 그 진상이 드러났을 때의 파장을 두려워했다.
『그래비티』
라이언이 우주복 안에서 사라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는 이 순간, 4년 전 놀이터에서는 한 아이가 그네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30분 후 라이언이 국제우주정거장에 도달할 때쯤, 지구에서는 수백 명의 과학자들이 그녀의 생존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6개월 후, 라이언이 NASA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그녀는 마침내 깨닫게 될 것이다. 사라가 죽었을 때 함께 죽었던 것은 딸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전지적 시점의 치명적 단점"
묘사가 아닌 주인공의 감정을 '설명' 하는 순간, 망한거다.
잘못된 예
밀드레드는 화가 났다. 왜냐하면 딸이 죽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분노는 정당했다. 사회 시스템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올바른 예
밀드레드의 분노 뒤에는 그녀 자신도 모르는 죄책감이 숨어 있었다. 안젤라가 죽던 날 밤, 그들은 싸웠다. 통금시간 때문에. 만약 그 싸움이 없었다면, 안젤라는 집에 일찍 왔을 것이고, 그 길을 혼자 걷지 않았을 것이다. 밀드레드는 이 마을 전체가 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자신만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예
모든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한다.
올바른 예
밀드레드가 안젤라의 방에서 느끼는 공허함은, 세상 모든 어머니가 빈 방 앞에서 느끼는 그 공허함과 같았다. 하지만 각자의 공허함에는 그만의 색깔이 있었다. 어떤 것은 파란색이고, 어떤 것은 회색이고, 밀드레드의 것은 붉은색이었다.
"모성서사와 전지적 시점"
"라이언이 사라를 그리워하는 이 순간, 지구상의 수백만 어머니들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시리아의 한 어머니는 폭격으로 아들을 잃었고, 아프리카의 한 어머니는 기아로 딸을 잃었다. 모성애는 개체 보존이 아닌 종족 보존의 본능이었고, 그 본능이 상실과 만날 때 생기는 고통은 우주적 차원의 비극이었다. 라이언의 눈물 한 방울은 중력 없는 우주에서 완벽한 구체를 이루며 떠돌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어머니의 슬픔이 압축되어 있었다."
"루이즈가 한나를 임신하는 순간, 그녀는 이미 딸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한나 역시 어머니가 될 것이고, 그 손녀 역시 어린 나이에 죽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헵타포드의 언어는 한 개체가 아닌 전체 혈통의 미래를 보여주었다. 루이즈의 선택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인류사의 한 고리였다. 그녀가 한나를 낳기로 결심하는 것은, 상실을 각오하고도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 진화의 다음 단계라는 것을 의미했다."
"밀드레드는 자신이 안젤라만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이 마을의 모든 딸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세 명의 십대 소녀들이 밀드레드의 광고판을 보고 자신들이 겪은 성폭력을 신고하기로 결심했다. 밀드레드의 분노는 개인적이었지만, 그 파급효과는 사회적이었다. 한 어머니의 복수가 전체 공동체의 각성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SF에서의 전지적 시점"
SF 장르에서 전지적 시점은 인간 중심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그래비티』와 『컨택트』의 우주적 관점
인간은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라이언이 지구를 바라보는 이 순간, 우주에서는 수십억 개의 다른 세계에서 수십억 종의 생명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라이언의 생존은 인간에게는 중요했지만, 우주적 관점에서는 하나의 미세한 사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세한 사건 안에는 사랑, 상실, 희망, 절망 등 우주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보편적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개별성과 보편성의 역설이 바로 인간 존재의 본질이었다.
『쓰리빌보드』의 권력 구조
밀드레드가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진 그 순간, 이 작은 마을의 권력 지도가 재편되고 있었다. 시장은 재선을 위해 밀드레드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계산했고, 지역 언론은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고 있었다. 윌러비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정치적 발언을 준비하고 있었고, 딕슨은 자신의 변화를 증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개인의 분노가 사회 전체의 변화로 이어지는 순간, 모든 사람이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했다.
"전지적 화자의 가장 어려운 과제는 '도덕적 중립성 유지' 다."
모든 것을 알지만 판단하지 않기.
모든 인물의 동기를 이해하지만 누구편도 들지 않기.
이것이 진정한 전지적 시점의 핵심이다.
"밀드레드가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진 것은 잘못이었다. 하지만 딕슨이 흑인 시민을 구타한 것도 잘못이었다. 윌러비가 병을 숨기고 수사를 소홀히 한 것도, 시장이 정치적 계산만 한 것도 모두 잘못이었다. 이 마을에는 의인이 없었다. 하지만 악인도 없었다. 모두가 각자의 상처와 두려움으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루이즈가 한나를 낳기로 결심한 것은 숭고했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이안이 겪을 고통도 현실이었다. 한나가 죽은 후 이안은 10년간 우울증에 시달릴 것이고, 그 과정에서 다른 가족들도 상처를 받을 것이었다. 사랑의 선택에는 항상 대가가 따랐다. 하지만 그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사랑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비극이자 영광이었다."
현대 독자들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정보들은 대부분 파편적이고 맥락이 없다. 전지적 시점은 이런 시대에 '의미의 총체성' 을 제공한다. 개별 사건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표면 현상 뒤의 숨겨진 구조를, 현재 순간이 과거와 미래와 맺는 관계를 보여준다.
SNS와 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일상을 엿본다. 하지만 그 엿보기는 피상적이다.
전지적 시점은 '진정한 공감의 가능성' 을 열어준다. 타인의 행동 뒤에 숨은 복잡한 동기와 상황을 보여주고, 우리 모두가 얼마나 비슷한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는지 깨닫게 한다.
"마무리": 신의 눈으로 본 인간의 숭고함
전지적 시점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숭고함을 드러내는 것' 이다.
라이언의 절망도, 루이즈의 선택도, 밀드레드의 분노도 모두 불완전하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인간다움이 빛난다.
전지적 화자는 이 모든 불완전함을 보면서도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그 이해를 관객과 나눈다.
세 어머니의 이야기가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될 때, 그들은 더 이상 개별적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종족이 겪는 보편적 경험의 구현체가 된다.
상실과 사랑, 절망과 희망, 분노와 용서.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개인의 고통이 어떻게 타인의 치유가 되는지, 한 순간의 선택이 어떻게 영원에 영향을 미치는지.
전지적 시점은 이 모든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들을 통해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고통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사랑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누군가에게 닿는다는 것을.
이것이 바로 전지적 시점이 주는 위로다. 신의 눈으로 봤을 때 드러나는 인간 존재의 의미.
모든 것을 아는 특권과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겸손함.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춘 화자만이 진정한 전지적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