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르 Jan 22. 2024

지구 끝날까지 감추고 싶은 글

글을 꼭 공개해야 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렇게 묻는 건 그러고 싶지 않아서다. 공개하지 않을 이유는 뭘까. 글에 자신 없어서, 글을 통해 내 생각이 드러나는 게 부끄러워서, 원치도 않은 사람들에게 내가 알려지는 게 싫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할 말이 있어서 글은 썼는데 이 글을 읽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을 때도 그러하다. 솔직하게 그,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을 투명한 유리알처럼 다 털어놨고 불특정 다수가 읽는 건 괜찮은데 그, 그녀만은 읽지 않았으면 싶다. 당사자는 읽는 순간 알아챌 게다. 그게 자신이라는 것을. 칭찬, 존경, 애정, 감사가 면면히 흐르는 글이라면 아마 글을 쓰고 당사자에게 먼저 보여주지 않았을까. '내가 당신을 이리 생각합니다. 어찌 마음에 드시나요?' 하지만 불만과 미움, 짜증, 분노가 행간을 뚫고 나가는 글은 그러하지 않다. 차마 면전에서 말할 수 없지만 담아놓을 수도 없어 대나무숲으로 달려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고 외쳤을 게다.


내게도 그런 글이 있다. 정말 쓰고 싶어서, 그 순간만큼은 그 글밖에 쓸 마음이 들지 않아서 신나게 썼는데 막상 인터넷 세상에 공개하려니 손가락이 움찔거리는 글. 내가 어떤 심정으로 글을 썼는지 공감과 위로, 격려를 받고 싶지만 차마 '발행'할 수는 없는 글. '글 속 주인공이 블로그 이웃도 아니고, 브런치 구독자도 아니고, 인스타 팔로워도 아닌데 설마 이 글을 보겠어? 인생 뭐 있어? 할 말도 못 하고 살아?'  당당하게 스스로 자유를 허하고 싶지만 이내 감당하지 못할 객기임을 깨달으면 그 글은 '내 컴퓨터' 폴더 안으로 들어간다. 빛을 볼 날은 요원하다.


당사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면 굳이 글로 쓰지 않았을 거다. 그에게, 그녀에게 감정을 쏟아낼 수 없어서 글로 쓴 거다. 말은 공기 중으로 날아가버리지만 글은 박제된다. 읽고 또 읽고 곱씹으며 가슴에 새길 수 있다. 내가 가족, 친구들을 향한 서운함을 깨알 같이 쓴 글이나, 인간으로서 어찌 그리 배려심이 없냐고 이전 직장 상사를 잘근잘근 씹어댄 글이 그런 류다. 10년 전 업무상 자주 만났던 사람이 얼마 전 내 브런치 글에 '응원합니다'를 댓글로 남겼을 때, 1초간 반갑고 이후 섬뜩했다. 댓글 옆에 붙은 실명 석 자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아갔다. 이전 글 중에 그를 부정적으로 언급했던 글이 있던가.


뒤끝이 생기는 글이라면 굳이 공개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누리는 자유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근간으로 한다. 열받고 속상하고 억울한 감정을 토로하는 건 내 자유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할퀴게 된다면 말리고 싶다. 얽힌 속내를 풀고 싶다면 홀로 털어내고 도닥이면 된다. 종이에 기도를 적는 마음이랄까.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같은 상황을 두고 해석하고 평가하고 기억하는 게 다르다. 내 안에 속상한 마음을 드러내다 보면 결국 상대 험담도 나오게 되는데 이건 누군가에게, 특히 당사자에게 온라인 ‘뒷담화’일 수 있다. 뒷담화만큼 비겁한 것도 없다. 시간이 흐른 후에 이불킥할 가능성도 크다. 얼굴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워지면서 자신의 인격을 의심하는 건 괴롭다.


글을 쓰는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배설과 치유는 그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정 쏟아내야 한다면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면 된다. 일기는 그러라고 쓰는 것이다. 온갖 잡욕을 다 써놔도 공식적으로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질타하는 자가 있다면 남의 일기를 훔쳐본 그가 잘못이다. 그렇게 여러 번 하다 보면, 감정이 해소되고 생각이 정리되고 상황이, 사람이 재해석된다. 나 역시 이런 과정을 거치며 관계에 대한 나만의 인생철학이 세워졌다. '나라고 다를 게 없다', '기대하지 말자. 서운해할 일도 안 생긴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지 않다'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는 게 현명한 건지 나름 방법도 생겼다. 이후 쓰는 글은 공개 가능하다. 한결 정제된 글을 쓸 수 있으니까. 가식적으로 포장한 글을 쓰라는 게 결코 아니다. 진심을 담은 글을 이전보다 반듯하게 쓸 수 있다는 뜻이다.


내게도 미친 '또라이'들이 존재한다. 화려한 미사여구 잔뜩 살려 일필휘지 글발을 날려주고 싶은 이들이다. 그들을 내 앞에 앉혀두고 똑같은 언어로 쏟아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 자신이 없다. 묵은 감정이 속 시원하게 사라질지 모르나 그들 마음에 난 상처를 보듬어 흉터를 남기지 않을 자신은 없다. 그들을 마주 대하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굳이 공개하지 않는다는 게 내 지론이다. 적어도 힘들 게 쓴 내 글을 누군가의 뒷담화 날리는 용도로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 쓰는 사람은 착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