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는 숙제여서 썼고 중학생 때는 사춘기 일렁이는 마음이 갈 곳 없어 썼다. 고등학생에겐 입시 스트레스의 탈출구가 필요했다. 짧고도 길게, 평범하고도 특별하게. 사흘, 일주일, 한 달씩 쉬어가기도 했지만 쓰는 일을 멈춘 적은 없다.
일기(日記).
일기를 써 본 사람은 안다. 날마다 자신의 생각, 감정, 경험을 낱낱이 쓰는 즐거움을. 하지만 꾸준히 쓰는 게 어디 쉽던가. 주기, 월기, 분기, 심지어 년기를 쓰기도 힘든 이들에겐 일기는 자주 등장하고 어김없이 실패하는 새해 계획 중 하나다.
쓰는 입장에선 참으로 별 것 없어 내놓기 부끄럽지만 읽는 입장에서 타인의 일기는 훔쳐보는 맛이 있다. 궁금하다. 매일 쓰는 이들은 뭔가 노하우가 있을 듯싶다. 그들의 일기를 쓱 한 번 구경하면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함부로 보여달라 물어볼 수도 없는 일.
매일 일기 쓰는 재미에 빠진 1인으로서, 아무도 묻지 않지만 슬쩍 알려주고 싶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기 쓰는 방법 4가지.
-어디에 쓰나
수중에 있는 노트, 다이어리 아무 곳에나 쓴다. 소싯적엔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하느라 예쁜 다이어리를 일부러 샀지만 요즘엔 손에 잡히는 대로 쓴다. 다이어리 디자인이 너무 멋지면 막 쓰기 어렵다. 반듯하게 형식을 갖춰 써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든다.
작년부터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사용하고 있다. 내겐 내지 디자인보다 종이질이 쓰는 일의 지속성을 좌우한다. 이 다이어리는 몰스킨 제품이라 좋아한다. 남편은 연애 시절부터 돈을 모아 내게 몰스킨 다이어리를 크기별로 선물하곤 했다. 그땐 아끼느라 수년동안 한 권을 다 채우지 않았는데 요즘엔 양질의 종이를 호사스럽게 누리며 쓴다.
다이어리에는 1월부터 12월까지 월간 일정표가 있고, 이어 하루치 메모란이 365개 있다. 매일 한 페이지, 주말엔 반 페이지 분량으로 날짜와 요일, 시간이 적혀 있지만 난 깡그리 무시하고 그냥 쓴다.
올해 1월 첫날부터 보름간은 인쇄된 날짜와 맞춰 썼다. 일정이 많거나 감정이 넘치거나 할 말이 쏟아지는 날은 한 페이지로 부족했다. 다시 옛 습관을 살려 마음대로 넘치도록 쓴다. 다이어리에 인쇄된 날짜와 안 맞는데 어떻게 하냐고? 그건 장식처럼 의미 없이 적힌 숫자라고 생각한다.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페이지 가장 위, 여백에 내가 쓰는 날짜가 '오늘, 그날'이다.
몇 해 전 아이패드를 선물 받고 한동안 '디지털 다이어리' 쓰기에 심취했다. 일기 템플릿을 자유롭게 바꿔 쓸 수 있어 신선했다. 그러다 작년 여름, 더운 날씨에 몸도 마음도 엿가락마냥 늘어질 때 책장 한편에 보관해 온 다이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빳빳한 첫 장을 펼치자 내게 새해가 다시 열렸다. 한 여름, 새로운 시간을 선사하는 기분이 그럴싸했다. 7월부터 시작한 일기장은 연말쯤 꽉 채워졌다. 일기를 쓰다가 0.5mm 젤펜의 잉크가 사라지는 걸 보면 야릇한 성취감도 생긴다. 당분간 아날로그 방식을 이어가려 한다.
-무엇을 쓰나
쓰고 싶은 모든 것. 일단 몇 시에 잤고 일어났는지 쓴다. 하루 적정 수면시간을 파악하면 나를 이해하기 쉽다. 날씨도 쓴다. 초등학생처럼. 날씨가 하루 컨디션을 좌우한다. 구름이 낮게 깔린 흐린 날은 신경이 곤두서고, 비 오는 날은 이유 없이 몸이 축축 처진다는 걸 기록하면서 알게 됐다. '맑음', 'cloudy', 'rainy', '겁나 추움'을 쓰면서 다짐한다. 날씨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에게 적당히 너그러워질 것. 해야 할 일 잔뜩 적어두고 욕심부리지 말 것. 일을 끝내지 못했다고 스스로 들볶지 말 것. 반면, 해가 반짝하는 날은 거침없이 엔도르핀이 돈다. 없던 일도 만들고, 다음 날 일까지 당겨서 한다.
그날 해야 할 주요 일정을 적는다. 해시태그를 붙여서.#일상글쓰기 #강의준비 #라라프로젝트17기모집. 해야 할 일이 굴비처럼 엮어진다. 떠오르는 생각, 아이디어, 감정도 적는다. 잘 된 일도 쓰고 망한 일도 쓴다. 기분 좋은 것도 쓰고 못마땅한 사람 욕도 쓴다. 예쁘게 반듯한 글씨로 정성껏 적을 때도 있지만, 펜을 들 기운조차 없을 땐 대충 흘려 쓴다. 그래도 나중에 펼쳐보면 무얼 썼는지 다 보인다. 더불어 그때 내 상태가 어땠구나, 도 보인다. 그래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무조건 다 쓰려고 한다.
-어떻게 매일 쓰나
해시태그를 활용하는 게 포인트다. 구구절절 쓸 시간도 에너지도 없지만 기록하지 않으면 후에 절대 기억나지 않을 일을 키워드 중심으로 쓴다. 스스로 하고 싶은 말도 표어처럼 적어둔다. #남과비교금지 #열등감무시 #진짜중요한걸놓치지말자 #피곤 #애들공개수업은왜신청했을까 #전시보러간날 #홀로채우기.
피곤해서, 다른 일이 많아서, 급한 업무 처리하느라 일기 쓸 시간을 내놓아야 할 때가 있다. 이럴 땐 건너뛴다. 대신 다음 날 간단히 요약해 쓴다. 이때도 해시태그, 키워드 활용! 쓰지 못할 이유는 늘 존재한다. 이런저런 핑계로 쓰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내가 일기를 써왔다는 사실조차 잊고 만다. 많은 일을 하고도 아무것도 안 한 듯 착각하게 된다. 기록하지 않으면 바쁘고 정신없는 것과 별개로 남는 건 없어 허무함과 자책감에 압사당하기 쉽다.
하루 일과를 촘촘히, 완성된 글로 쓰려면 시작하기 힘들다. 완벽하게 쓰지 않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충분히, 내가 만족할 만큼 쓸 수 있다. 일기는 나를 위한 글이다. 남을 위해,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이 아니라.
-○○○ 하면 꾸준히 쓸 수 있다
그렇게 매일 쓴 일기를 주간 단위로 돌아본다. 일명, 주간 피드백. 지난 일주일동안 한 게 없는 것 같아 어이없을 때 아주 좋은 처방이다. 시간이 갈수록 과거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난 도대체 뭐 하고 사는 건가, 시간만 낭비했네,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다가 일주일치 일기를 펼치면 깜짝 놀란다. 나름 많은 일을 했구나, 다만 일주일 중 하루, 수요일에 사람들을 만나느라 글을 못 쓴 거뿐이네. 이렇게 '팩트'를 확인하고 나면 마음이 가붓해진다.
연말을 정리하고 새해 계획을 세울 때도 다이어리는 매우 훌륭한 자료다. 지난해 내가 무엇으로 바빴고 무엇을 이뤘으며 어떤 부분에서 부족했는지 한 장 한 장 넘겨 보면, 배 아래에서 단단하게 힘이 차오른다. 미사여구 빼고, 멋져 보이는 문장 빼고, 솔직하게 날 것으로 쓴 단어와 문장들이 글쓰기에 신선한 영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이를 경험한 이후로, 일기만큼은 고심하지 않고 손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마구 쓴다.
작가 이슬아는 <일간 이슬아>로 빚도 갚고 대중적 인지도도 얻었다. 하루 분량만큼 생각하고 하루만큼의 시간과 공간을 아울러 딱 그만큼 글을 썼다고 한다. 우리라고 못 쓸까. 지금 쓰는 글이 별 볼 일 없을지 몰라도 이후에 묵은 김치처럼 잘 익어서 깊고 묵직한 메시지로 농축될지 누가 아는가. 죽기 전에 찬란한 글 한 편 남기고 싶어서 오늘도 쓴다, 나는, 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