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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Apr 14. 2024

글쓰기가 지겨운 적은 없으세요?

강의 끝날 즈음, 질문을 받고 눈을 굴렸다. 글쓰기 선생답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솔직한 마음을 말해버릴까. "아, 그게, 아마도, 지금이요. 하하." 모범답안을 생각하기 전에 요즘 심정이 툭 터져 나왔다. 딱 들켰다.


글쓰기가 지겨운 적이 왜 없겠는가. 글 쓰면 신나고 안 쓰면 더 신난다. 쓰는 고통에 몸부림쳐 본 사람이라면 안다. 쓰는 재미, 기쁨은 분명 존재하지만 언제나, 늘 글쓰기가 순전한 행복만을 주는 건 아니다. 내 생각과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적확한 단어를 찾지 못할 때는 괴롭다. 표준국어대사전과 인터넷에 존재하는 수억 개의 단어 가운데 하나를 세밀한 핀셋으로 집어서 하얀 화면에 옮겨줬으면 싶다. 내 생각을 하나씩 담당한 단어들이 요리조리 조합해 절로 문장이 돼 춤을 췄으면. 거기에 신박한 표현이 더해졌으면. 이래서 사람들이 챗GPT에게 묻는지도 모른다. '내 생각을 니 마음대로 써줘.' 내 생각을 로봇이 알 리가 있나. 니 마음대로 쓰는 게 내 생각일 리도 없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괴로운 경험이 반복되면 지겨워지고 하기 싫어진다. 글쓰기가 싫었던 적이 있다. 기자로 남이 시키는 기사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써야 했을 때. 아무리 둘러봐도 '때거리'가 없는데 그래도 내 몫의 글을 써야 할 때. 일기나 에세이처럼 내 생각과 감정으로 채워서는 안 되는 글을 '팩트' 중심으로 공정하게 써야 할 때, 언론인의 사명과 기자 정신 어쩌구를 읊어댔던 나를 경멸했다. 미쳤지.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하긴 써야지, 써야 한다. 신문이 빈 공간으로 나가는 일은 언론탄압에 반해 회사 차원에서 기사를 내렸던 일이 아니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돈 벌어야 하는 일에 하고 말고 취사선택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일이 십 년간 간헐적으로, 허나 쉬지 않고 반복되었을 때 '퇴사'라는 결단은 매우 자연스럽게 날 설득시켰다. 물론 꾸역꾸역 글을 써야 했던 훈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글쓰기가 자유 선택의 영역이라고 지겹지 말라는 법은 없다. 늘 잘 써지는 것도 아니고, 항상 쓸 거리가 넘실대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글 쓰는 것 보다 훨씬 쉽게 나의 도파민을 뿜어내는 일도 허다하다. 그래도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의지를 다졌다면 써야 한다. 끄적거리다가 다른 이들이 쓴 글을 헤집어보고 책장에 쌓인 책도 들춰본다. 산책의 힘을 믿으며 수많은 위인이 그러했듯 걷기도 하고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한다. 물소리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상당히 효과적이다. 그것도 약발이 먹히지 않을 때는, 그냥 쓰지 않는다. 정말 하기 싫을 때는 아무리 자판 위에 손을 얹고 있어 봐야 애꿎은 '백스페이스' 키만 하염없이 누를 뿐이다.     


지겹다고, 하기 싫다고 손을 놓으면 좋으련만, 그리하지도 못한다. '써야 하는데', '써야지' 한없이 자신을 들볶는다. 까짓것 안 쓰면 그만인 것을, 굳이 인상 써 가며 입을 삐죽거려 가며 글쓰기 세계 주변을 맴도는 건 얻는 게 있어서다. 털끝만 한 기쁨, 배꼽 아래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즐거움. 잠들기 전 글 한 편을 완성하면 그날 하루를 어찌 보냈든 상관없다. 무조건 해피엔딩. 기분 좋게 꿀잠 자기 좋은 상태가 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랬다.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 쓰는 유익과 쓰지 않는 자, 둘 사이에서 내 마음의 부등호가 어디로 향하는가에 따라 쓰거나 쓰지 않는 게 아닐까.


다양한 형태의 고통이 나를 종종 에워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적 쓰고 있는 건 '쓰지 않고는 나답게 살 수 없어서'다. 슬그머니 펜을 놓았다가도, 노트북을 물리고 딴 곳을 배회하다가도 결국 쓰는 자리로 슬금슬금 돌아온다. 하루 중 가장 고요하고 즐거운 시간은 가만히 앉아 글쓰기용 플레이리스트를 가동하고 손가락을 움직일 때다. 힘들 때는 쉬어가면 된다. 이토록 좋은 걸 지겨운 존재로 남겨두지 않도록.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나의 글쓰기에 숨통을 틔우도록. 계속 써야 한다는 강박으로 쉼 없이 같은 것을 반복해서 쓰다 보면 글이 낡아질 수 있다. 쓰는 마음이 낡아지면 곤란하다.


글쓰기는 나와 애증의 관계다. 사랑만 하고 싶지만 참으로 쉽지 않은 존재. 내가 마음을 주는 만큼 내게도 사근사근 마음을 내어줬으면 싶지만 매우 자주 까칠하게 구는 존재. 그렇다고 떼어버릴 수는 없는 존재. 밀당에 재주가 없는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좋아했다가 미워했다가 지겨워했다가 그리워했다가 온갖 희로애락에 마음을 졸이며 글을 쓰지 않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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