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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Mar 05. 2024

97세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

1927.2. 8 ~ 2024. 2. 26

'할머니 2월 14일 입원'

설 이후 엄마에게 연락이 잦았다. 우리가 뵌 날 새벽, 할머니는 갑자기 쇠약해졌고 결국 병원에 들어갔다. 식사를 잘 못하는 어르신은 며칠 수액 맞으면 금세 기력회복한다고 했다. 큰 걱정하지 않고 일상을 보냈다.


열흘 후, 24일.

엄마에게 난데없이 페이스톡이 왔다. 평소 영상통화를 하지 않는 터라 의아했다. 화면엔 할머니 얼굴이 등장했다. 뺨이 쑥 들어간 게 우리 할머니 같지 않았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할머니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심각하네. 마음이 쿵쾅거렸다. 행여 내 얼굴에 걱정이 묻어날까 싶어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할머니는 나와 전화만 해도 그날 하루가 날아갈 듯 기분 좋아진다고 했다. "할머니, 제가 또 내려갈게요!" 조금만 더 힘내시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게 할머니에게 가능한 일일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25일.

남동생과 함께 점심을 먹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근래 며칠 사이 엄마와 여동생이 발신인으로 뜨면 심장이 툭 떨어졌다. 할머니가 위독하다고, 오래 못 가실 듯하다고 했다. 남은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남동생과 고속도로를 탔다. 조금 전까지 우리 가족끼리 근교로 같이 여행을 가자고 계획을 나누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여행은 취소해야 할 것 같지?" "... 어."


할머니는 호흡이 가빴다. 남은 에너지를 모두 끌어모아 숨을 들이마셨다. 눈동자는 이미 회색빛이었다. 작은 손은 두둑하게 부었다. 가늘게 주름진 손등을 조심히 만졌다. 신체 기능을 나타낸다면 지금 할머니의 그래프는 0 근처로 점점 수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 저예요." 감긴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온 것을, 내가 당신의 큰 손녀라는 것을 인지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 왜 이리 알 수 없는 게 많은지. 정말 마지막이 가까워온 걸까.



할머니 귀에 대고 나지막이 성경말씀을 암송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병실은 어수선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할머니는 마지막 숨을 부여잡고 있는데, 주변의 산 자들은 너무 아무렇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고 쉽게 내쉴 수 있는 숨을 별 일 아닌 듯 뱉어가며 어제 먹은 죽 이야기와 다리가 쑤시다는 푸념을 이어갔다. 삶은 그러한 거였다. 같은 시간에 있지각자 다른 시간을 살아내는 일. 다가올 내일이 당연한 사람과 그러하지 않은 사람의 일 분 일 초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


자꾸 목이 메었다. 할머니를 위해 뭔가 더 해드리고 싶은데, 단 한 숨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뭔가 도와드리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그뿐이었다. 마음이 산란하여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야속했다.  "할머니, 또 올게요. 우리 또 뵈어요." 인사드리고 뒤돌아 나오는 길, 눈물이 쏟아졌다. 진짜, 또, 다시, 뵐 수 있을까. 


돌아 나오는 나를 향해 간병인이 말했다. "손주들 기다리셨나 봐요. 아까 손녀분이 기도하는데 할머니 맥박이 다시 올라갔어요." 어쩌면 할머니가 조금 더 생을 붙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할머니에게 좋은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의 숨소리가 힘겹도록 거칠어서 점점 닫히는 이생의 육중한 문을 여린 몸으로 겨우 감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흔일곱, 누가 봐도 할머니의 삶은 짧지 않았다. 그래도 2주 사이에 생의 시곗바늘이 그리 급하게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그래선 안 됐다. 할머니가 조금 더 살았으면, 할머니를 조금 더 마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자꾸 들었다. 가능하다면 할머니를 꼭 1인실로 옮겨달라고, 남은 가족들이 둘러앉아 평소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찬양을 들려 드리라고 당부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 핸드폰이 울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밤새 연락이 올까, 자꾸 잠이 깼다.


26일, 다음 날 아침,  

"병'원서 급하다고 빠리오라하네" 한눈에 봐도 정신없이 보냈을 엄마의 문자에 손이 떨렸다. 어제 다린 셔츠를 챙겨야 하나,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어쩌지. 의미 없이 집안을 서성였다. 잠시 후, 가족 단톡방에 메시지가 떴다. "할머니 소천하셨습니다."


젠가 나올 말이었지만 누구 하나 언급하지 않았던 말. 언제 현실이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던 말이 글자로 박히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마치 생사를 오가는 영화 속 주인공을 보며 손에 땀을 쥐다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긴장감이 해소되듯. 남편과 두 아이들에게 연락한 후, 샤워를 했다. 어지러이 늘어뜨린 짐을 트렁크에 넣고 곱게 다린 셔츠와 검은 정장, 코트를 챙겨 입었다.  


마지막 호흡을 끝낸 할머니의 표정은 자는 듯 평화로웠다고 했다. 내가 병원을 떠나고 바로 할머니는 1인실로 옮겨졌고, 다른 가족들이 할머니의 마지막을 고요하게 지켰다.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어. 할머니 주무시는 것 같아. 금방 일어나실 것 같아." 동생의 말처럼 온 가족이 장례식장에 모이는 동안, 할머니는 평안하게 잠들었다.


햇살이 따뜻했다. 겨우내 추위가 사라지고 어느새 봄이 온 듯했다. 차창으로 보이는 하늘은 유난히 맑고 파랬다. 할머니, 천국 가셨구나. 말없이 환히 웃으며 작은 손으로 늘 내 손을 꼭 잡아주던 할머니. 내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게 기쁨이 된다는 걸 알려준 할머니. 너른 침대에 조그맣게 누워있던 우리 할머니가 떠올라 자꾸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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