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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Apr 07. 2024

오매불망, 벚꽃만 기다렸습니다

내내 봄 탓을 하고 있었다. 와야 할 봄이 더디 와서 몸이 찌뿌둥하다고. 정신도 흐릿하고 머리도 돌아가지 않고 마음도 심드렁하다고. 뭔가 다부지게 하려 애를 써도 바람은 차고 하늘은 잿빛이라 도통 한 발 떼기가 어렵다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계절이 어떠하든, 날씨가 어떠하든 할 일을 묵묵히 해야 하는 거라며 자책했다. 나약함을 계절 탓으로 돌리고 있는 건지, 게으른 봄 때문에 나약해진 건지 헷갈릴 때,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들렸다. 벚꽃이 피지 않아 벚꽃축제가 연기되고 딸기가 익지 못해 썩어간다고. 모두 늦은 봄을 애석해하는구나, 위로가 됐다.

 

봄이 늦긴 해도 오지 않을 건 아니었다. 투덜거림이 무색하게 며칠 사이 동네방네 벚꽃이 만발했다. 매년 그러했듯, 봄은 느릿느릿 알아채지 못하게 다가와 무심하게 앉아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또 봄은 완연해지는구나. 겨울이 길다고, 봄이 오지 않는다고 원망해 봐야 뭐 하나. 겨울의 시간이 충분히 지나야 봄이 오는 것을. 메마른 가지가 물을 머금고 작디작은 벚꽃 잎이 촘촘히 박힐 시간이 채워져야 흐드러진 꽃더미가 펼쳐지는 것을.




선생님...
요양원에 핀 벚꽃을 바라보면서
책 표지의 꽃이 생각나며
이어 선생님이 생각나서
사진을 보내드립니다...
건투를 빕니다...


그는 올해 누구보다 벚꽃을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더딘 봄이 원망스러운 것도 그가 생각나서였다. 일흔이 넘은 그는 이제껏 수업에서 만난 이들 중 최고령자였고, 암 투병 중이었다. 지난해 말, 글쓰기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지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질문'이 무엇인지 물었다. "궁금한 건 딱 한 가지입니다. 과연 내년 봄에 제가 벚꽃을 볼 수 있을지 그게 가장 궁금해요." 글쓰기 수업을 매개로 그는 인생을 정리하면서 책을 썼고 그 작업을 내가 함께 했다. 책 표지에 벚꽃을 담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무조건, 당연히 벚꽃을 볼 거라는 믿음을 그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그의  인생을 정리한 자전적 에세이


그리고 며칠 전, 

그는 책 표지 속 풍경과 꼭 닮은 벚꽃 사진을 내게 보냈다.


그가 보낸 벚꽃 풍경



겨울을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듯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선을 갖지 못한 적이 더 많다.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 한정원, <<시와 산책>>



그만큼 봄을 기다리던 사람도 없었을 게다. 유난히 꽃이 더딘 벚나무를 바라보며 그보다 마음을 졸인 이도 없었을 게다. 차가운 겨울을 보내는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봄을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겨울의 시간이 채워져야 새 계절이 온다는 것을 그는 짧지 않은 인생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겨울을 온전히 살아내고 마주한 분홍 꽃망울이 얼마나 반갑고 기뻤겠는가.



예전과는 달리 좀 아프지만
담담히 하루하루 책 읽으며 일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항암과 수술이 기다리는데
이 또한 이겨내겠지요.


봄인데 여전히 춥다고 심통 부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봄꽃과 봄 햇살을 찾아 헤매느라 조바심 났던 게 부끄러워졌다. 우리 모두에게 유한한 인생, 오늘 하루 담담히 살아내는 것 이상으로 최선이 있겠는가. 그의 문자를 거듭 읽으면서 생각했다. 오지도 않은 시간을 걱정하느라 애쓰지 말고 내일 생이 끝난다고 해도 부끄럽지 않게 봄의 시간을 살아야겠다고. 이 봄도 머지않아 사라져 버릴 테니까. 그에게 답을 보냈다. "올봄, 벚꽃을 꼭 보실 거라고 믿었어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 그러하실 거예요." 흐드러진 벚꽃에 눈이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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