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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넘어 다시 대학생, 중간고사를 치르다

by 오르

대한민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으니, 바로 시험기간에는 날씨가 기막히게 좋다는 사실이다. 특히 매 학기 중간고사. 1학기 중간고사 기간이면 메마른 겨울 기운은 사라지고 대지에 드리운 봄햇살이 따사롭다. 머리칼을 날리는 바람은 보드랍고 눈에 걸리는 꽃은 황홀하다.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은 청명한 가을 한복판.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에 마음이 오르내린다. 하늘이 저리도 나를 부르는데 계절의 꼬드김을 겨우, 억지로, 힘겹게 누르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심정. 놀이터에 나가 놀지 못하는 어린아이마냥 서글프다. 시험만 끝나면 원 없이 나가 놀겠다고, 같이 놀자고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도 꼭 나들이하겠다고 스스로 달랜 후 태블릿을 열고 코를 박는다.



"요즘 중간고사 기간이라..."

내 근황 토크를 듣던 이들이 "애들이 시험 보면 엄마도 신경이 쓰이죠."라고 화답한다. 물론, 고등학생인 두 아들도 중간고사 대비 공부 중이다.

"아니, 제가 중간고사를 봐야 해서.."

오해 금지, 왜곡 정정을 위해 말을 덧붙이니 뭔 소린가 싶은지 빤히 쳐다본다.

"제가 공부를 시작했어요. 사이버대학이요."

곁에 있던 이는 설명도 다 듣지 않고 말을 또 낚아챈다. "어머나, 대학원 공부를 해요?"

끄응. 아뇨, 대학이요. 학부생으로 들어갔다고요.


사이버대학교에 들어가겠다는 결정은 올해 초 전격 이뤄졌다. 새해 다짐의 맥락에서, 이제껏 하던 일과 전혀 상관없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나름의 'refresh', 익숙한 일상에 한 줄기 바람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다. 1~2월 원서 접수 기간 내내 알만한 사이버대 홈페이지를 들락거렸다. 이런 자발성은 인생에서 몇 번 등장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드물게 결단한 일인데 강의 업로드가 기다려지고, 과제마저 눈에 불을 켜고 할 만큼 신났으면 했다. 온갖 전공을 훑어보고 샘플 강의를 들었다. 딱히 구미가 당기는 게 없었다. 뭘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왜 굳이 대학 공부까지 하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 음, 대단한 청사진이 있는 것도, 생계와 승진을 위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뜬금없이 '사이버대학'이 떠오른 데는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지금은 나 자신도 모를 이유, 후에 시간이 지나서야 '그래서 그리 하고 싶었구나' 납득될 이유 말이다.


그러다 모 대학 영어학부를 보는 순간, 10년 전 하고 싶은 일이 '영어 공부', 20년 전 하고 싶은 일도 '영어 공부'였던 게 떠올랐다. 지금도 여전히 잘하고 싶으나 욕심만큼 실행하지 못하는 게 '모국어만큼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기'다.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자유롭게 떠드는 기쁨을 죽기 전에 누릴 순 없나. 이제껏 살아온 궤적을 따져보니 10년 후, 20년 후에도 내 영어 실력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인생을 책임져야 할 '어른'의 나이에 아쉬움을 안은 채 살고 싶진 않았다.


공부는, 재미나다. 전공 다섯 과목, 교양 한 과목을 듣는데 생각보다 온라인 강의 수준이 높다. 과목마다, 교수마다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등록금이 아깝지 않다. 언어는 꾸준히 해야 는다. 학원을 갈 수도, 듀오링고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복잡한 입학 절차를 거쳐 다시 대학까지 들어간 건 만만치 않은 의무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돈이 들고 에너지가 들어가야 공부를 건너뛸 다양한 합리화에 굴하지 않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매일 하는 건 여전히 과도한 부담이다. 매주 일요일 저녁 11시 59분 전까지 해당 주차 강의를 모두 들어야 '출석'이 되는지라 주말 저녁이 가장 바쁘다. 그래도 계속 강의 듣게 하고, 간간히 숙제도 하게 하고, 퀴즈도 풀라고 해서 이전보다 자주 영어에 노출 중이다. 개인 취향으로 선택한 교양 강의는 보너스 선물이다. 도슨트가 들려주는 유명 화가의 삶과 작품 이야기인데 듣다 보면 어느새 강의가 끝난다.


대학 입시 정보를 캐도 모자랄 고3 엄마가 순수한 자기만족과 행복을 위해 자기 계발에 빠져 있어도 되나, 강의를 들으며 시험공부에 골몰하며 자문했다. 아이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종용하는 대신 엄마가 직접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조금 더 현명하리라고 아직은 믿고 있다. 현장 수업보다 훨씬 더 자기 주도성을 발휘해야 하는 온라인 강의. 그동안 컴퓨터 앞에서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르는 게 결코 쉽지 않았겠구나, 조금 더 아이들을 이해하게 됐으니 뭐, 나쁘지 않다.


중간고사는 2주에 걸쳐 끝났다. 평생 쌓아온 벼락치기 신공은 쉽게 버릴 수가 없어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시험 직전까지 바빴다. 외우고 고개를 들면 빠르게 포맷되는 나이라는 걸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도 50분 동안 집중력을 놓치지 않고 문제를 풀었다. 어쩌면 모두 다 맞을지도 모른다...!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중간고사를 치른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한 단계 성장시킨 것 같아 혼자 마음으로 둥실거린다. 하나, 둘 시험 답안이 올라오는데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다시 보니 처음인 듯 문제들이 심히 새롭다. 아, 벼락치기의 한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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