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문을 연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눈을 굴려 스캔한다. 새로울 것 없는 옷 가운데 뭘 입을지 고민한다. 계절마다 옷 한두 벌은 꼭꼭 샀던 것 같은데 늘 입을 옷이 없다. 고심해서 산 옷들이 하나같이 비슷하다. 하얀 셔츠, 줄무늬 셔츠. 남색 카디건, 검정 블라우스. 결국 오늘도 손에 들리는 건 민무늬 하얀 셔츠다. 취향이 참으로 한결같다.
아무런 장식 없이 그저 하얀 셔츠를 즐겨 입는다. 옷을 화려하게 입는 재주가 없어서인지 장고 끝에 고르는 건 깨끗하고 단순한 셔츠다. 청바지와 입어도, 정장 바지와 입어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시간과 장소, 목적을 크게 타지 않아 실패할 확률도 낮다. 입고 나서 단정한 모습을 확인해야 마음이 편한데 하얀 셔츠는 많은 경우 그러하다. 평소와 조금 다르게 입어보겠다고 시도하다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로 외출하면 하루 종일 어깨가 움츠러든다. 옷장 구석에 있던 화려한 옷을 꺼내 입은 날엔 표정 하나, 손짓 하나마저 어색해 내가 아닌 나 자신에 불편해한다. 문자 그대로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만 같다.
옷이 편해야 은은하게 옷 주인의 멋스러움이 드러난다.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도 그랬다. "패션이란 청결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청결하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 즉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의미다. 인간이 의상에 속박되는 것을 나는 가장 경멸한다. 인간과 의상이 하나를 이룰 수 있는 상태, 이를 위해 일체의 거추장스러운 치장을 배제한다." 깨끗해서 가장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옷, 하얀 셔츠가 내겐 그렇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때로는 예의 바르고 때로는 발랄하게 보이는 매력이 있는 옷. 칼라가 있는 셔츠도, 목둘레가 시원하게 파인 티셔츠도 하얀 게 최고다.
다분히 밋밋한 이 옷을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흰 셔츠가 있는지 아는가. 칼라 모양, 목의 파임, 소매 둘레, 밑단 처리에 따라 옷은 수만 가지 종류로 늘어난다. 디자인이 단순하고 무늬가 없는 옷은 재질이 특히 중요하다. 면 함량이 높은 옷을 좋아하는데 최고의 면을 사용하는 옷은 대개 고가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랬다. 무엇이 좋은 건지 잘 모를 땐 과일은 가장 알이 큰걸 고르고 옷은 비싼 걸 고르면 된다고. 누가 들어도 알 만한 고가의 명품 브랜드를 찾으면 쉽게 해결될 일이겠지만 지극히 평범한 생활인에게는 부담스럽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하다면 발품을 팔아 미묘한 차이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완전무결한 옷을 갈망하나 옷 쇼핑이 버거운지라 인생 셔츠를 손에 넣는 건 끝나지 않은 숙제다.
옷장 가득 허연 옷만 여럿인데도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하얀 셔츠를 찾아 헤맨다. 비싸지 않지만 저렴해 보이지 않으며,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는 하얀 셔츠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똑같은 백색 정장을 옷장 가득 채우고 그 옷을 즐겼던 디자이너 앙드레 김처럼, 늘 회색 반발 셔츠를 입는 마크 저커버그처럼 여러 벌 사들인 후 돌려 입을 계획이다. 저커버그의 언뜻 평범해 보이는 회색 면 티셔츠는 장당 300달러(약 40만 원)에 달하는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라는 걸 아는가. 그가 맞춤 제작한 옷인데 기존 면사보다 부드럽고 짱짱한 이탈리아산 최고급 코마면으로 장인이 제작했단다. 기본에 충실한 최고의 옷을 손에 넣는 건 이렇듯 노력을 요한다.
가장 단순한 것이 때로는 가장 어렵다는 걸 옷장을 열 때마다 느낀다. 단순하지만 심심하지 않고, 단순하지만 허술하지 않으며, 단순하지만 고유한 멋을 간직한 옷. 민무늬 하얀 셔츠를 입고도 세련된 분위기를 풍길 수 있다면 그건 분명 그 사람만의 품격 때문일 게다. 완벽한 셔츠를 고르는 것과 어떤 옷을 입어도 자기만의 멋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 둘 다 어렵지만, 내겐 둘 다 욕심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