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시타 나츠 소설 <조용한 비를> 읽으며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유키스케. 유키스케가 찬바람을 맞으며 걸음을 멈춘 건 파친코 가게 옆에서였다. 여기 붕어빵 가게가 있었구나. 따뜻한 것이 먹고 싶던 참에 구수한 냄새가 은은해서, 유키스케는 온몸을 잔뜩 움츠리면서도 붕어빵을 기다렸다. 한 입 먹고 그 맛에 반한 유키스케는 자기도 모르게 가던 길을 되돌아와 '맛있어요'하고 말한다.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창문 너머에 있던 고요미 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동시에 볼을 발갛게 붉혔다.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으로. 미야시타 나츠 소설 <조용한 비>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첫 장에서 마음을 뺏겼다. 유키스케가 다음 날 아침 붕어빵을 기다리며 절망적이지 않은 하루를 시작한 것. 주륜장 응달에 민들레가 필 무렵, 유키스케와 고요미 씨가 이따금 저녁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된 것. 거기엔 거창하진 않아도 필시 따뜻한 침묵과 담백한 기쁨이 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고요미 씨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고요미 씨와 조금 더 친했다면 어땠을까. 아무리 다녀도 익숙해지지 않는 병원에서 나와, 유키스케는 생각했다. 고요미 씨는 내가 돌봐주기를 바랄까? 장마가 끝나가는 7월이었다. 3개월 하고 사흘간 푹 자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고요미 씨는 눈을 떴다.
고요미 씨는 사고를 기억하지 못했다.
고차뇌기능장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밥을 먹거나 대화하는 등 평범한 생활은 괜찮았지만 잠이 들면 그날의 기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고를 당하기 전날로 기억이 돌아갔다. 매일 혼란스러워하고 쪼그라들고 그러다가 작아진 고요미 씨를 유키스케는 필사적으로 원래 크기로 늘리려고 했다. 함께였던 하루를 기억하면서. '외인성 정신병'이라는 진단서에 분노하기도 하면서. 선천적 마비로 늘 목발을 짚고 다니는 유키스케이지만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듬으며 둘은 함께 살기 시작한다.
고요미 씨는 예정대로 가을부터 가게를 다시 열었다. 어느 저녁, 한 고등학생 손님이 찾아와 도대체 공부는 왜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열을 올렸다. 하나하나 예를 들면서까지 그게 장래에 그래서 무슨 도움이 되냐고 물었다. 고요미 씨는 동의하지 않았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본인도 잘 모르는 법이야. 도움이 되고 안 되고는 사람에 따라 다르니까. 도움이 되는 시기도 다르고. 그러니까 지금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게 공부를 놓을 이유가 되진 못해.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만 가지고 세계를 만들어. 내가 있는 세계는 내가 실제로 체험한 것, 내가 보고 듣고 만진 것, 생각하고 느낀 것, 거기에 약간의 상상력이 추가된 것만으로 이루어졌어."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어도 고요미 씨와 내가 다른 세계에 있다는 거야?"
"내 세계에도 너는 있어. 네 세계에도 내가 있고. 하지만 그 두 세계가 똑같지는 않아."
그렇게 대답한 고요미 씨는 '노란 모래'에 대해 설명했다. 태어나고 자란 마을에선 겨울 끝 무렵 노란 모래, 즉 황사가 내렸다고.
"그런데 이렇게 말해도,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해도 노란 모래가 내린 날의 정경은 완벽하게 전달되지 않아. 모래가 내린 날의 기상 조건이나 모래 알갱이의 크기 같은 걸 설명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노란 모래를 어느 정도는 상상할 수 있겠지. 그래도 내 모래와 너의 모래는 달라. 왜냐하면 노란 모래가 내린 날에 운동화를 신으면 어떻게 더러워지는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너는 모르잖아. 밖에 널지 못하고 집 안에 널어둔 빨래에서 축축한 냄새가 나는 것도. 이렇게 노란 모래에 따라오는 건 아주 많거든. 네게는 황사가 지식일 뿐일지라도 나한테는 세계의 일부야."
내가 일곱 살 때 우리 엄마는 붕어빵을 팔았다.
고백하건대 이 책에 사로잡힌 건 내가 아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감 중 시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보는 것은 직접적으로 주의를 빼앗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삼십 년쯤 흐르면서, 나는 시각보다 촉각이 보다 점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슈퍼, 중국집, 전파사, 금은방, 세탁소가 쭈르륵 있는 골목 한편에 진한 녹색 철문이 있었다. 그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웃 건물의 창문이 왼편으로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지하 공장으로 내려가는 유리문이 있었다. 거기가 우리의 집이자 공장이었다. 자동차 한 대쯤 들어갈 만한 마당도 아닌 공간에서 나는 느리게만 가는 시간을 쉴 새 없이 헤집었다.
겨울이 왔을 때 엄마는 철문 맞은편 가로등 아래에 좌판을 차렸다. 이제 막 서른 살쯤 된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붕어빵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손님도 제법 많았다. 틀에 거침없이 반죽을 붓고, 뒤집는 손길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야물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대충 잠바를 걸친 뒤 붕어빵 굽는 엄마의 곁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받아먹은 붕어빵의 촉감, 뜨거움, 맞닿은 엄마의 손. 이러한 촉감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엄마의 분식집으로 이어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 골목 어딘가였다. 그때 나를 지배하던 번들거림을 기억한다. 엄마가 건네주는 기름진 동전이 싫어서 주머니에 넣고 짤짤짤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던 시간. 그 동전으로 슈퍼며 문방구며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녔던 시절이 이제 와 선명하다.
"너는 너만의 세계를 일구기 위해 학교에 다니는 거 아닐까? 만약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학교란 그런 곳이라고 하나의 단원 혹은 지도의 한 지점으로 네 세계에 추가될 거야. 하지만 만약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세계의 출입구가 될 거야. 너에게는 돌파구일 수도 있고, 언제든 열 수 있어. 그 문을 통해 너는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어느새 내 곁으로 온 고요미 씨가 그렇게 덧붙인다.
책 속의 말이 나에게 곧 위로처럼 다가왔다. 사랑은 어디에서 어떻게 왔다 가는지. 상처는, 그리움은, 눈물은 다 어떻게 흘러 몸과 마음에 저장되는지 궁금하던 날들이 있었다. 있었던 것이 없어진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가정 불화와 부모님의 이혼과 여러 가지 어려움을 지나가며 한때는 부모님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혼자 다 컸다고, 의지할 곳은 없고, 그래서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지 세상의 모든 의심을 끌어다 쓰기도 했다.
허나 엄마가 되면서 생긴 큰 변화는 이해할 수 없는 걸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랜 마음공부를 통해 만난 내면아이와 엄마가 된 후 만나는 내면아이는 또 달랐다. 내 아이와 마주하는 촉각의 세계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니까 네가 아이였을 때 말이다. 너를 어루만지는 절대적인 손길이 있었어. 비록 너는 기억하지 못해도. 인정하지 않아도. 그 모든 게 설령 바라는 형태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분명한 사랑이 있었을 거야. 나는 이제야 그 세계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 어린 나에게 이야기한다. 당신들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알게 된다. 고요미 씨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제가 나의 어제와 다르지 않음을 배운다.
사람이 기억으로 만들어졌다면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붕어빵의 맛이 한층 더 깊어지는 걸 보면서, '달은 밝은데 비가 내리네' 소리 없이 내리는 비 속에서 울고 있는 고요미 씨를 보면서, 유키스케는 기억이 흘러내려도 무언가는 어디에 남아있음을 깨닫는다. 붕어빵이 고요미 씨의 기억을 담당해주고 있다면, 나에게 그건 다름아닌 촉각의 세계일 테지. 언젠가 나의 아이들이 이 세계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마음만큼은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능한 꽉 껴안아주는 것. 그것만은 오늘도 내일도 아직은 해줄 수 있는 일이므로.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지금. 함께하는 이 순간을 소중히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사랑일 테니까.
"내 세계에 고요미 씨가 있고 고요미 씨의 세계에는 내가 산다. 둘의 세계가 살짝 겹쳤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책의 마지막 문장을 조금쯤 바꿔본다. 나의 세계에 아이들이 있고 아이들의 세계에는 내가 산다. 둘의 세계가 살짝 겹쳤다.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