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경력 3년 차에 접어들었다. 나의 첫 제자들도 4학년이 되어 전국 소년체전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졌다. 그와 동시에 상위기관에선 엄청난 압박의 공문이 내려왔다.
대략 공문의 내용은 이렇다.
*지도자 임용 날부터 3년 안에 전국 소년체전에서 상위 실적을 내지 못했을 경우에 해고하겠다.*
엘리트 운동선수라면 당연히 목표는 하나 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 겨우 선수다운 선수를 만들어 가고 있는데 상위 실적을 내라니, 무슨 이런 경우가 있나 싶었다. 다른 종목은 잘 모르겠지만 기계체조는 최소 기본기만 3년 이상 걸린다. 종목별로 특성이 다른데, 그리고 내가 가르치는 제자는 이제 막 4학년이 되었는데, 상위기관에서 너무 무리한 조건을 내걸지 않았나 싶었다. 아니, 이건 통보였다. 금 나와라 뚝딱하면 나오는 게 아닌데 말이다.
학교에 전용구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선수다운 선수를 키워보겠다고 매번 저 멀리 있는 훈련장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녔다. 그럼에도 불만은 없었다. 이런 공문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나는 해고되면 그만이다 생각했지만 지금껏 나와 함께 훈련해온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내가 해고당하면 이 아이들이 계속해서 운동을 하려 할까? 새로운 지도자가 와도 훈련 환경이 좋지 못하는데 버틸 수 있을까?’ 당장 코앞에 놓인 상황에 온갖 걱정이 난무했다. 종이 쪼가리 하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전국 소년체전에서 입상하는 수밖에. 그 공문 하나 때문에 스트레스가 점점 쌓여가고 극도로 예민해지기까지 한다.
물론 아이들은 이 상황을 알 일이 없다. 이래선 안됐지만 스트레스와 예민함이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이 갔다. ‘이따위로 밖에 못하나? 어?’ ‘그렇게 해서 메달 따겠어?’ 훈계가 아닌 신경질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이 섞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성적을 내고 싶었다. 아니, 내야만 했다. 아마도 이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아주 못된 지도자가 되어가고 있는 시점이.
각 학교별로 소년체전 멤버들이 모이고, 합동훈련을 시작했다. 마찬가지 각 학교별 지도자들도 모였다. 아무리 열심히 지도를 해도 상위 입상은 어려울 거라는 예상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은 이를 악물었다. 아이들의 미래가 걸린 대회인 만큼 지도자끼리 한 마음 한뜻으로 단합했다. 꼭 자신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모두 한 팀이 되어 선수들과 물고 뜯고 지지고 볶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회 날 까지 최선을 다했다.
대망의 전국 소년체전 경기 하루 전 선수들과 미팅을 한다.
“자, 이제 선생님들은 할 일 다 했다. 경기장에 들어가면 너희가 여태 배웠던 거를 보여줄 차례다. 실수해도, 실수한 건 잊어버리고 다음 기술에 신경 쓰자. 오늘 푹 자고 내일 파이팅 하자!”
“네!”
다음날, 경기장엔 각 학교별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감독 선생님, 학부모님들까지 시뻘건 단체티셔츠를 맞춰 입고 관중석에 모였다. 마치 붉은 악마를 보는 듯했다. 경기가 시작되고 모두 하나가 되었다. 경기장 지붕이 날아갈 듯이 선수들을 응원한다. 여태 운동을 해오면서 이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응원해주는 학부모님들은 처음 봤다. 이런 분위기가 처음이라 그런지 몰라도 살짝 부끄럽긴 했지만 한편으론 너무 든든했다.
이제 나의 제자가 할 차례다. 전국에서 제일 큰 대회에서 긴장할 법도 한데 내색하지 않고 곧 잘했다. 결승전에 오를 실력은 되지 않았지만 자기 기량만큼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무난하게 소화해 냈다. 나의 제자뿐만 아니었다. 분위기를 타서 그런지 모든 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했다.
경기가 끝났다. 지도자, 선수들, 모두 최선을 다해 수고했지만 씁쓸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학교장, 교감, 감독 선생님도 마찬가지 성적이 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는지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코치님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학부모님들이 시원한 물을 건네며 맥 빠져있는 지도자 등을 토닥토닥한다.
먼저 경기가 끝난 우리 팀은 관중석에서 다음 파트 팀들을 구경했다. 하지만 난 구경하지 않았다. 다음 파트 팀들은 상당한 실력을 지닌 팀들이라 안 봐도 비디오라 생각하고, 경기장 밖으로 나가 쓰라린 담배를 태웠다.
‘하, 끝났네. 시간 금방 가는 구만.’
그렇게 함 참을 경기장 밖에서 쪼그려 앉아있었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린다. ‘아, 뭐고 짜증 나 죽겠는데.’
“야 너 어디야?”
선배 지도자가 말했다.
“밖에 있는데요? 왜요?”
“빨리 경기장으로 와 우리 단체 3등 했어!”
“진짜요?”
“빨리 와! 시상대 올라가야 돼”
자포자기하고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모두 가능성이 없다고 했던 대회에서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선수들의 얼굴엔 기쁨이, 지도자, 감독 선생님, 학부모님들은 고생과 기쁨이 공존하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이뿐만 아니었다. 여자초등부 단체 입상이라는 역사적인 기록도 함께 남기게 되었다.
“우리 3등 했으니까 안 짤리겠제?”
지도자들끼리 진담이 섞인 농담을 던진다.
그 후, 전 종목 지도자들이 단합하여 상위기관의 공문이 매우 부당하다고 건의하게 된다. 그 결과 지도자들과 협상을 통해 안정적인 새로운 공문이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