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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May 29. 2020

결혼 기념일

사랑의 모양


 풀잎이 싱그러움을 숨기지 못 하는 초여름이다. 깨끗하고 청량한 5월의 어느 일요일. 은숙과 기운은 담임 선생님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주례를 들으며 비원 근처의 웨딩홀에서 결혼을 했다. 갓 스물을 넘긴 어린 신부와 신랑이었기에 많은 관심과 축복을 한 몸에 받았을 터였다. 은숙은 구름처럼 풍성한 주름에 고운 반짝임이 넘실거리는 실크 드레스를 입었는데 어딘가 몽환적인 긴장이 흐르는 웨딩 드레스였다. 귀 아래까지 크게 부푼 어깨 장식에서 세기말 감성이 느껴졌다. 은숙이 이 드레스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다면 한번쯤 입어보고 싶은 마음이 희미하게 생기는 드레스였다.


 옛날 앨범을 들춰볼  마다 은숙은 결혼식 사진을 여전히 불만족스러워 한다. 웨딩홀 직원이 해준 화장이. 정확히는 짝짝이 눈썹이 마음에  들어서 표정도 뾰로퉁했다고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메이크업을 종일 참아내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말을 듣고 은숙이 정말 어릴  결혼 하기는 했나보다 생각했다. 오래 . 매니저가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사이 좋은 송충이 눈썹을 정성스레 그려주더니 예쁘다, 이대로 근무해라.  일이 생각났다. 웃으며 거절하는 법을 몰라 퇴근시간만을 기다렸었는데.  날의 은숙도 고쳐달라   용기가 없었던 걸까 싶다. 하지만  마저도 생기있고 사랑스러워 일부러 그렇게 그려줬다 해도 납득이   같다. 피로연에선 결혼식의 긴장이 풀렸는지 그러거나 말거나 친구들과 디밭에 앉아 뿌까 머리를 하고 활짝 웃고 있는 은숙이었다. 은숙은 은숙  자체로. 기운은 기운  자체로 빛이 났다.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풍성한 안개꽃과 백합을 꼽은 기운은 헤벌쭉 웃으며 서있다. "우리 아빠 멋있었구나~" 앨범을 보다 가끔 놀라 말하면 은숙은 목소리를  톤으로 높이며 기다렸다는  답했다. " 아빠 멋있었어~ 훤칠해서 아주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어~" 기운이 여전히 멋지다는 . 그가 매리아스에 반바지를 입고 집을 돌아다닐땐  까먹곤 한다.


 서른 해 넘게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내 나이보다 많은 그 해를 짐작하기란 어려워 그래서 내가 제대로 챙겨준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를 생각 해 봤다. 나의 부모를 축하하는, 일 년에 몇 개 안 되는 이런 기념일마다 자책과 아무렴 어때를 반복하며 살고있다. 한 마디로 불성실한 편이다. 이 다음에 아주 고급진 일식집에서 회를 사주겠다는 이루지 못한 약속만 잊지 않으며 말이다. 은숙과 기운은 서로 다른 목적으로 내가 그 약속을 잊지 않게 도와주었다. 드라마에서 결정적인 비밀이나 음모가 만들어지는 고급 일식집 장면이 나오면. 은숙은 저렇게 두 발을 쏙 아래에 넣고 앉아 회를 먹어봤음을 자랑했다. 그 잠깐동안 비치는 황송한 은숙의 표정을 내가 기억하기 때문에 잊지 않았다. 기운은 내가 취업을 해 바빠지거나 결혼을 해 멀어지면 그 약속을 까먹을까 애가 탔는지 가끔씩 약속을 상기 했기에 잊을 수 없었다. 내년에는 모시고 가야할텐데 생각한다. 순수한 마음을 고이 전한 적은 더러 있었는데 고맙게도 은숙은 내 편지와 작은 선물들을 모두 간직해주었다.


 회색 교복에 빨간 넥타이를 하고 다니던 고등학생 때. 당시는 친구의 생일이나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큰 종이에 롤링 페이퍼를 돌리는 게 유행이었다. 그 덕분에 덜 민망한 마음으로 살면서 딱 한 번 이벤트를 해줄 수 있었다. 나는 꽃무늬 색종이를 사서 우리 반 학생 수만큼 하트를 접었다. 마흔 명의 축하 메세지가 필요했다. 내가 다 접진 않았다. 우리 반은 문과에, 중국어가 아닌 러시아어에, 체육 말고 미술 수업을 듣는 이상하게 평화로운 반으로 마흔 명중에 남학생이 다섯 명도 채 안 되는 반이었다. 교실에서 혼자 색종이를 접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여자애들 사이에선 누구던지. 손재주가 좋건 나쁘건, 이 기회에 하트 접기를 배우고 싶건 둘러 앉아 색종이 접기를 도와주는 게 미덕이었다. 그리곤 하나하나 20주년 결혼 기념일을 축하드린다는 메세지를 써주었다.


'앞으로 30, 40, 50 주년 내내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수인이 착해요. 축하드려요.' '아침마다 차로 수인이랑 같이 태워주셔서 감사해요. 즐거운 날 되세요.' 오랜만에 꺼내보니 잉크도 날아가지 않고 그대로 선명했다. 몇 안 되는 남자애들도 투박한 글씨로 동참해주었다. 친구 엄마로부터 기특하다는 소리도 듣고 돈 만 원 용돈도 받을 수 있던 이벤트였으니 실속을 더한 뿌듯함으로 남았지만 그 이후로 이벤트를 해 줘 본 적이 없다. 이제는 편지 한 통 써주는 게 왜 조금 민망해진 일인지 모르겠다. 엄마는 딸을 키우는 기분이 어떤 건지 설명이 필요할 때마다 이 이야기를 했으므로 이 사건 말고 대단한 이벤트가 없었던 건 맞는 것 같다.


어제가 은숙과 기운의 결혼기념일이었다. 나는 재난 카드로 꽃이나 사갈까 하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결혼기념일과 별개로 마음에 남는 다른 이벤트를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결혼 하기 전에, 그 동안 이 집에서 나를 키워주고 사랑해줘서 너무 고마웠다고 말이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그런 김에 글을 썼고 자기 전, 필름 카메라로 거실에 앉아 쉬고 있는 은숙과 기운을 한 방 찍어주었다.  


 뉴스 좀 보게 골프 좀 그만 보라며 기운을 나무라는 은숙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내가 결혼을 하고 집을 떠나도 이 둘은 늘 이대로 평소처럼 잘 살 것 같다.


결혼해서는 정말 부지런 해라, 바질바질(부지런) 해야돼. 김치랑 다진 마늘 얼린 거는 엄마가 가져다 줄게. 지나온 결혼과 다가올 결혼을 서로 생각하며 하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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