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녹아 물이 되니 눈이 비가 되어 내리는 때, 우수(雨水)
토요일 아침이면, 온라인 Zoom으로 요가 수업을 받는다. 1주일에 한 번씩 랜선으로 만나는 선생님은 절기를 통해 계절의 변화에 맞게 몸 가짐, 그리고 마음 가짐을 챙겨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분이다. 2월 19일 오늘 아침에는 "오늘이 우수(雨水)에요. 옛날 사람들은 겨울에 좋은 균만 살려서 이 때 장을 담궜다고 하는데 우리가 지킬 뚝심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요."라고 수업을 시작하셨다.
'비 우(雨)'와 '물 수(水)'로 뜻 그대로 '우수'는 눈이 비가 되어 내리는 때, 즉 얼음이 녹아 물이 된다는 절기이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물기 촉촉하게 풀리기 시작하는 때이다. 퍼뜩 물만 있으면 잘 자란다는 '미나리' 생각이 났다. 물을 뜻하는 옛말 ‘미’와 나물을 뜻하는 ‘나리’의 합성어로 이름 자체가 ‘물에서 나는 나물’이란 뜻이기도 하고, 약초명이 ‘수근(水芹)’이기도 하다.
비옥한 땅을 일구겠다는 꿈을 꾸며 이주한 미국 이민 가족을 그린 영화 <미나리>에서 외할머니(배우 '윤여정'님)가 손자에게 말한다. “데이빗아, 미나리는 잡초처럼 막 자라니까 누구든지 뽑아 먹을 수 있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미나리를 먹고 건강해질 수 있어. 김치에도 넣어 먹고 찌개에도 넣어 먹고 아플 땐 약도 되는 미나리는 원더풀 이란다. 아이고~ 바람 분다. 미나리가 고맙습니다. 땡큐 베리머치, 절하네”
영화 제목이 <미나리>인 이유도 질긴 생명력과 적응력을 가족의 서사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고 감독은 밝혔단다. 물만 있으면 어디서나 쑥쑥 자라는 초록의 풀, 지식백과에서는 겨우내 몸 속에 쌓인 독소를 배출하는 약용 음식으로 권하고 있다.
때를 알리듯, 안선생이 싱싱한 미나리 한 단을 들고 집에 왔다. '미나리로 뭐 해먹지?'하는 고민은 자연히 삼겹살을 구워 곁들어 먹는 것으로 정해졌다. 청도읍 한재골의 지역 명칭을 따서 청도읍의 특산물이 된 '한재미나리'를 삼겹살에 곁들여 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청도 지역에 방문했을 때, 초록의 미나리 밭 곳곳에 삼겹살을 굽는 비닐하우스 형의 가게들이 줄지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미나리는 음식과 함께 들어온 중금속 등을 흡수하여 채 외로 쉽게 내보내도록 도와주는 해독 및 정화작용이 있다고 하니, 미세먼지 많이 마시는 현대인들에게 삼겹살과 함께 먹는 것은 약이되지 싶다. 초록의 미나리는 피를 맑게하고, 간의 활동을 돕기로도 익히 유명하다. 복국이나 매운탕에 한 자리 차지하는 것이 익숙한 것은 피로회복, 숙취해소에 탁월하길 기대한 선조들의 지혜가 반영된 것이려나.
선조들의 지혜가 발휘되어 미나리가 잘 어울리는 음식이 또 하나 있다. '탕평채'다. 청포묵에 고기볶음과 데친 미나리, 구운 김 등을 섞어 만든 무침으로 탕평채라는 이름은 탕탕평평(蕩蕩平平)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이란다. 임금 '영조'는 '왕도탕탕 왕도평평(王道蕩蕩 王道平平)'에서 따온 구절로 당파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미로 '탕평채'라는 음식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하사함으로써 뜻을 전하였단다.
탕평채에는 오방색(五方色)이 담겨있다. 오방색은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의 다섯 가지 색을 말한다. 음과 양의 기운이 생겨나 하늘과 땅이 되고 다시 음양의 두 기운이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오행을 생성했다는 음양오행 사상을 기초로 한 것인데, 중앙과 동서남북의 방위를 뜻하기도 한다. 한식에는 한 가지 음식에 다섯 가지 색을 지닌 재료들을 사용함으로써 오방색을 구현한다는 의미를 담은 대표적인 음식이 탕평채이다.
녹두묵의 푸르스름한 흰색, 볶은 고기의 붉은색, 미나리의 푸른색, 김의 검은색은 조선시대 권력을 잡았던 양반들의 당파로 알려진 서인, 남인, 동인, 북인을 대표하는 색이라고 한다. 탕평채가 처음 등장할 당시가 서인이 집권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주재료로 흰색 청포묵을 쓴 것이다.
나는 '탕평채'라는 음식을 압구정에 위치한 <설매네>에서 처음 맛보았다. 참기름 향이 꼬숩게 입혀진 음식은 미나리의 향긋함과 더불어 오방색 재료가 조화롭게 어울리고, 청포묵의 식감이 재미있다. 임금의 뜻대로 세상만사 평화로워질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다가오는 봄을 맞아, 겨우내 몸 속의 묵은 때를 물로 씻은 듯 벗겨내기 위해서라도 미나리를 챙겨 먹어보자. 한창 초록 물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