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호 너머의 역사,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
혁명의 슬로건, 이상인가 현실인가?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이 외침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를 넘어, 새로운 사회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선언이었다. 자유(Liberté), 평등(Égalité), 박애(Fraternité)라는 세 단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자, 구체적인 정치·사회적 실천의 지향점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들은 혁명의 빛나는 기치이면서 동시에, 혁명 자체가 마주한 근본적인 모순과 한계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다. 수많은 민중이 ‘자유’를 외쳤지만, 그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평등’은 선언되었지만, 여성과 노예, 빈민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박애’는 혁명 동지 간의 형제애로 불렸지만, 서로에 대한 강제와 숙청의 논리가 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자유는 정말 모든 시민의 권리였는가, 아니면 새로운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었는가?”
“평등은 법전 속 문장에만 머물렀는가, 아니면 구체적인 삶의 조건으로 실현되었는가?”
“박애는 진정한 인간적 연대였는가, 아니면 혁명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는가?”
이 세 질문은 단지 과거를 되묻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자유와 평등, 연대라는 가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이 남긴 유산은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해방의 과제’로 남아 있다.
자유: 해방인가, 새로운 억압인가?
프랑스혁명에서 외쳐진 '자유'는 구체제의 억압적 구조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다. 절대왕정 하에서 왕권은 신의 권위로 정당화되었으며, 시민들은 신분제의 족쇄에 얽매여 정치적 권리조차 박탈당한 상태였다. 혁명은 이러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년)’을 통해 사상과 언론의 자유, 정치 참여의 권리를 천명했다.
그러나 이 자유는 공포정치(1793~1794) 시기에 극명한 모순을 드러냈다.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 프랑스혁명 당시 자코뱅파의 지도자 중 한 명)와 자코뱅파(Jacobin, 프랑스혁명 당시 중앙 집권적 공화정을 주장한 급진파)는 ‘공화국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반대파를 숙청했으며, 자유는 오직 혁명 이념에 복종하는 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조건부 권리로 전락했다. 이는 혁명이 추구한 자유가 새로운 종류의 억압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사례였다.
평등: 제도의 파괴, 하지만 여전한 차별
혁명 이전의 프랑스 사회는 철저한 신분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직자(1계급), 귀족(2계급), 평민(3계급)으로 나뉜 이 구조는 법 앞에서의 불평등, 조세 부담의 불균형, 특권적 정치 참여를 제도화한 체계였다. 혁명은 이 계급 질서를 해체하고,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을 선포했다.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은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으로, 이후 민주주의의 규범이 되었다. 그러나 이 ‘평등’은 어디까지나 법률적 선언에 그쳤다. 실제로는 부르주아 계급이 새 지배층으로 부상하며, 하층민과 농민의 삶은 여전히 빈곤과 불안정 속에 놓였다.
더 큰 문제는 평등의 적용 범위였다. 여성, 노예, 식민지 민중은 ‘시민’의 범주에조차 들지 못했다. 여성 운동가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a femme et de la citoyenne)에서 “여성도 정치적 주체”임을 외쳤으나, 결국 그녀 역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혁명은 평등을 외쳤지만, 평등은 누구에게나 허용되지 않았다.
박애: 형제애인가, 동지애인가?
‘박애(Fraternité)’는 가장 추상적인 가치였지만, 동시에 프랑스혁명의 가장 근본적인 이상을 내포한 개념이었다. 모두가 형제처럼 살아가는 사회, 이념과 계급, 지역을 넘어선 연대의 공동체—이것이 박애가 지향한 세계였다.
그러나 이 형제애는 철저히 선택적이었다. 이념이 다르면, 계급이 다르면, 심지어 출신이 다르면 박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여성과 노예, 외국인은 형제애의 울타리 밖에 있었다.
혁명기 자코뱅당은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공공의 적을 제거해야 한다”고 외치며, 연대보다 숙청과 처벌을 우선시했다. 결과적으로 ‘박애’는 무조건적인 연대가 아니라, ‘동지애’에 가까운 이념적 결속으로 기능했다. 박애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혁명에 복무하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이상은 살아남았는가?
프랑스혁명은 수많은 피를 흘렸고, 수많은 이상이 짓밟혔다. 자유는 때로 억압이 되었고, 평등은 불완전했으며, 박애는 배제와 조건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유·평등·박애’라는 구호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19세기와 20세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민주주의와 인권운동, 여성 참정권 운동, 반식민지 해방운동의 깃발 아래 이 세 단어는 여전히 살아 숨 쉬었다.
그것은 완성된 구호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질문되어야 할 가치이며, 현실과 충돌하며 구현되어야 할 미완의 과제이다.
프랑스혁명이 던진 이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한 문장 요약
프랑스혁명의 슬로건인 ‘자유·평등·박애’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인간 해방이라는 영원한 과제를 향한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