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때 즈음, 남들은 입학하자 마자 챙겨 듣는 교양수업 하나를 뒷북 치듯 수강한 적이 있다. 그 수업을 먼저 들은 선배 말로는 고학번들이 들어오면 항상 손을 들게끔 한다는 것이었다. 수업 첫 날, 교수님은 선배의 후기대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셨다. "어이, 고학번들 손!" 그 큰 강의실에 딱 두 명만이 손을 들었다. 나와 그 친구. 그렇게 나는 나와 전혀 다른 전공을 가진, 알게 될 리 없을 것 같았던 그 친구를 만났다.
무용 전공이었던 친구와 나의 일상은 서로 교집합이 거의 없을 정도로 달랐다. 수업이 아니면 우연히 지나가면서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내가 다닌 사회과학대학과 그 친구의 예술대학이 하나의 건물을 나눠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교양수업이 있는 인문대학 건물을 나오면 나는 보통 동아리실이나 과방으로 향했고 그 친구는 연습실로 갔다. 내가 PPT와 논문들 사이에 파묻혀 노트북을 노려보며 보고서를 쓸 때, 친구는 더 높고 멋진 점프를 위해 식단을 조절하고 체중계와 싸우며 연습했다.
그렇게 공통점 없는 그 친구와 함께 했던 학기는 순식간에 끝났고, 우리들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조금씩 교집합 없는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 후 한참이 지나고, 우연히 도서관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도서관에서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친구는 전공과 상관없는 책들을 읽고 있었다. 생명공학, 철학, 아동교육 등 매번 책의 주제가 달라지길래 궁금함을 못 참고 물어봤더니, 자신만의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라고 대답했다. 매일 몸을 움직여서 연습하는 게 일상이라서 가끔 이렇게 몇 시간씩 가만히 앉아서 아무 책이나 읽는 게 좋다고. 일상과 상관없는 일, 평소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을 일, 그런 의외의 일을 하는 게 꽤 스트레스가 잘 풀린다는 그녀의 대답이 신선했다. 나도 언젠가 그 방법을 해보겠다고 대답했고, 그녀는 중요한 팁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잘할 필요 없고, 그냥 하면 돼.”
그 친구와의 추억은 이게 전부다. 지금은 연락조차 닿지 않는 그녀가 아직까지 생각이 나는 건 그 친구 덕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계획 강박증인 내가 그림을 그리며 스트레스를 풀게 된 건,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의외의 일’을 해보라던 그녀의 말 덕분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어떤 색깔로, 어떤 순서로, 어떤 그림을 그릴 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계획했겠지만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하얀색 캔버스 위에 아무 스케치 없이, 일단 그 순간 마음에 드는 물감을 들어 칠한다. 칠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색을 섞어서 덮는다. 그래서 시작할 때는 밤하늘을 그리겠다고 생각했던 게 나중에는 바다가 되어 있기도, 도시에서 시골 풍경이 나오기도 한다. 30분만에 그림을 완성할 때도 있고, 수차례 덧칠해서 완성까지 반년이 걸린 그림도 있다. 계획 없이 그리다 보니 물감도 빨리 쓴다. 데드라인도 규칙도 없다. 무계획, 충동, 비효율이 난무한다. 평소라면 스트레스를 엄청 받을 법한 상황이다. 하지만 요동치는 캔버스 위와 달리 신기하게도 마음은 오히려 편해졌다.
하지만 한때 그림 그리는 걸 완전히 그만두기도 했었다. 내가 그린 그림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많아지면서 조금씩 “잘” 그리고 싶었던 때였다. 잘 그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자 거침없이 칠하던 캔버스 위로 머뭇거리는 시간이 늘었다. 물감 고르는 손끝에 고민이 생겼고,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은 보기 싫은 자회상처럼 불편해졌다. 그때 비로소 친구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의외의 일을 한다는 건, 일종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고, 균형을 맞춘다는 건 잘할 필요가 없다는 것임을. 잘할 필요 없고, 그냥 하면 된다는 걸.
최근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잘 그리고 싶다는 욕심이나 계획대로 하겠다는 강박, 그런 것들을 다 내려놓은 채 두 손 가벼이 힘은 쫙 빼고. 그냥 저냥 내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렇게 그리고 있으면, 한쪽으로 기울어져 날카롭게 요동치던 마음이 평평해지는 게 느껴진다.
누구에게나 균형을 잡는 방법은 필요하다. 가끔은 의외의 일도 해보면서, 당신만의 균형 잡는 방법을 찾길 바란다. 잘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깨에 들어간 힘은 잠시 빼놓고.
“Slow down you crazy child
And take the phone off the hook
and disappear for awhile
It’s all right
You can afford to lose a day or two
When will you realize
Vienna waits for you”
- Billy Joel <Vienn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