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연 Nov 14. 2020

특별한 순간의 역설

 특별할 것 같은, 아니 특별해야만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어떤 이에게는 합격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는 프로포즈의 순간일 수도 있으며, 뱃속의 아이가 열 달의 기다림 끝에 세상에 나오는 순간일 수도 있다. 혹은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찾아올 인생의 마지막 날, 그 마지막 순간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내게는 ‘20대 마지막 생일’이 그랬다. 29살 생일이 있는 그 날 하루만큼은, 24시간 내내 매분 매초 반짝반짝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다짐과 달리 29살의 생일은 여느 평범한 날들과 다를 게 없었다. 지극히도 평범한 하루였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볼수록 그 하루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특별한 순간은 사실 ‘특별하지 않다’는 역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내가 만난 특별한 순간의 역설을 짧게 기록해본다.


 10월의 어느 날. 운동을 끝내고 집에 와서 가득 쌓인 빨래통을 비우고 있는데 별안간에 초인종이 울렸다. 저녁도 아니고 밤도 아닌 이 애매한 시간에 찾아온 손님들이 궁금해 서둘러 인터폰을 봤다. 익숙한 얼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치킨에 맥주에 선물까지, 양손 가득히 바리바리 싸 들고 온 회사 동기들이었다. 언제 봐도 좋은 사람들, 어디에 있던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그 사람들과 함께 간만의 야식을 먹으며 생일 전야제를 했다. 생일의 시작을 알리는 자정이 되자 동생은 아이패드로 열심히 꾸민 사진과 함께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이윽고 저 멀리 일본과 파리에서도 메시지가 날아왔다. 생일 축하 메시지는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날아왔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내내 미소 짓게 해주었다.


 똑같을 줄 알았던 출근길은 우연히 만난 대리님 덕분에 즐거워졌다. 9시까지 얼마 남지 않은 그 시각, 커피는 꼭 마셔야 한다며 회사 앞 작은 카페에 들러 호기롭게 커피를 주문했다. 카페 사장님의 배려로 우리가 시킨 커피가 제일 먼저 나왔고, 그 커피를 손에 쥔 채 회사까지 전력질주 했다. 테이크아웃 컵을 성화봉송 하듯 높이 들고 뛰어갔던 그 길이 우당탕 정신 없었지만 즐거웠다. 겨우 9시 직전에 사무실에 도착한 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컴퓨터를 키자 생일을 축하하는 회사 동료들의 메신저로 화면이 가득 찼다.


 점심은 동기들과 함께 내 취향만이 잔뜩 반영된 피자를 시켜 먹었다. 늘 그랬듯 남은 점심시간을 쪼개 회사 근처 호숫가 주변을 산책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한참 웃었다. 그들은 내 취향에 꼭 맞는 선물들을 건네 주었고, 햇살이 좋아 내가 생각이 났다며 회사 옥상 테라스로 나를 불러준 동기도 있었다. 테라스에서 만난 10월의 햇살과 바람은 분명 선물이었다. 10분 정도의 짧은 일탈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친한 언니가 보낸 택배 하나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대학생 때 참 많이 의지했던, 내게 참 소중한 사람이 보낸 깜짝 선물이었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고 언니는 내게 가장 먼저 결혼소식을 알려주었다. 행복해하는 언니의 목소리를 듣자 코끝이 찡해졌다. 소중한 사람의 기쁜 소식은 내게도 기쁨이 된다는 걸, 아주 잠시 잊고 있었다.


 그 날 오후, 거의 두 달을 매달려온 숙제 같았던 업무를 마쳤다. 업무 자료를 받아 본 부장님은 웬일인지 칭찬을 후하게 건네셨고,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정시에 퇴근했다. 이른 밤이 찾아온 퇴근 길, 생일이면 늘 그랬듯이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낳아주고 잘 키워줘서 감사하다는 나의 말에, 잘 커줘서 더 고맙다고 하는 사람들이 내 가족이어서 행복했다. 집에 도착해 좋아하는 드라마의 최신화를 보며 저녁을 먹었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선물로 받은 케이크를 후식으로 먹었다.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가장 편한 자세로 침대 위에 드러누워 이렇게 생각했다. 행복하다. 오늘 하루가 참 행복하다, 라고.


 나의 20대 마지막 생일은 지극히도 평범한 하루였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회사로 출근했고, 정신없이 일을 했으며, 틈틈이 별거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었다. 특별할 것 없이 평범했다. 그런데 평범했지만 참 좋은 하루였다. 이 날 같은 하루로 한 달을 더 보내고 싶을 만큼, 참 좋은 하루였고 나는 참 행복했다.


 특별한 순간은 사실 특별하지 않았다.




“점점 더 좋은 걸

난 나라서 행복해

더 기분 좋은 건

내 곁에 너 있다는 거”

- 레드벨벳 <행복>



작가의 이전글 그때, 그 집, 그 계단 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