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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연 Sep 03. 2020

그때, 그 집, 그 계단 위

 서울에 있을 때 하숙집에서 살았다. 도로변 안쪽으로 들어오면 생각보다 꽤 가파른 계단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그 계단들을 오르다 숨이 차오를 때쯤 왼편에 금장으로 된 현관문이 하나 나왔다. 그 현관문을 열면 나오는 2층으로 된 집. 그 집에서 7년을 살았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서 하루를 시작했고 그 계단을 다시 올라가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 7년을 꼬박 채우고 하숙집을 떠났다. 하숙집을 떠나는 전날 밤, 나는 그 현관문 앞 돌 계단 위에 한참 앉아 있었다. 한겨울 잠옷 위에 패딩 하나를 걸친 채 계단 너머의 풍경, 냄새, 소리를 기억 속 어딘가에 꾹꾹 눌러 담았다. 계단 맞은 편에 있던, 동네에서 가장 늦게까지 하던 쌀국수 집의 불이 꺼지고 나서야 나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요즘 자꾸 기억 속에 담아 놓았던 그때, 그 집, 그 계단 위의 시간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처음으로 혼자 상경해 하숙집으로 들어가던 날, 고향에서 부친 짐은 아직 오지 않았고, 택배상자 안에 수건을 다 집어넣은 나는 새 수건을 사러 나갔다. 역 근처 마트에서 수건 몇 장을 사서 돌아오던 길, 그 높은 계단을 올라가다 서서 뒤돌아보고 또 올라가다 서서 뒤돌아보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여기가 내 동네구나’, ‘나 이제 대학생이구나’ 생각하니 매 걸음걸음이 신기하고 설렜다. 그리곤 돌계단 위에 앉아 잠시 멍을 때리기도 했다. 그리운 그때의 시간들을 기억 속에서 꺼내면 항상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장면 뒤로 수많은 순간들이 이어진다.


 생각이 많을 때면 새벽에 혼자 계단에 나와 앉아 한참동안 노래를 들었다. 코 언저리가 살짝 시릴 만큼 새벽공기를 가득 들이마시면, 날숨으로 쓸데없는 걱정과 생각들이 날아갔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찬 새벽공기만이 오롯이 남은 그 순간이 참 좋았다. 가끔은 전화를 받기 위해 계단에 앉아 있기도 했었다. 방음이 잘 되지 않았던 탓에 전화가 길어질 것 같으면 외투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는데, 친구의 SOS에 출동하는 느낌이 들어 번거롭거나 싫지 않았다. 그렇게 계단에 앉아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며 같이 욕하며 화도 내고, 울기도 하고, 배가 접히게 웃기도 했다. 그러다 계단 아래 도로변 쪽에 작은 음식점이 하나 생겼는데, 거기서 하숙집에서 만난 친구랑 함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의 생애 첫 아르바이트였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그 친구와 계단 중간에 걸터앉아 퇴근 기념 캔맥주를 마셨고, 사장님은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에도 종종 우리들을 불러 저녁을 챙겨 주셨다. 사장님이 다른 곳으로 가게를 옮기기 전까지, 계단을 오르기 전 모퉁이에 있던 그 가게에 들리는 것이 내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그런 일상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하숙집을 거쳐갔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방에서 조금 달라진 일상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인턴 생활을 시작했고, 매일 아침 7시 20분에 집 앞 정류장을 지나는 버스를 타기 위해 계단을 정신없이 뛰어내려갔다. 인턴생활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취업활동을 시작하자 겨울도 함께 찾아왔다. 모 회사의 최종면접이 있던 그 겨울의 어느 날, 나는 보기 좋게 면접을 망쳤고 그 계단 위에 서서 구두 위에 눈이 내리는 걸 바라보며 울었다. 높고 가파른 계단이 꼭 내 현실 같아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그냥 서서 울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울었고, 긴 겨울이 끝날 때쯤에야 나는 기다리던 소식을 들고 하숙집 가족들에게 뛰어갈 수 있었다.


 기억 속에 담아온 순간들은 이것들 말고도 훨씬 더 많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해주겠다고 한 가득 장을 봐온 하숙집 아주머니의 장바구니를 대신 들고 올라가던 순간. 오랜만에 가는 고향 방문에 들떠 허리춤까지 오는 무거운 캐리어도 한 손으로 번쩍 들고 내려가던 순간. 문득 올려다본 계단 위 하늘이 예뻤던 순간. 이런 순간들이 요즘 참 그립다.


 왜 이리도 그리울까.


 아무래도 지금의 일상이 많이 달라져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지금의 내 일상은 7년 전 그때와 달리 예측가능한 상황이 더 많고 단조로워졌다. 뭔가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서투른 열정보다,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인내심이 필요한 순간이 더 많아졌다. 코로나 19로 인해 어딘가로 떠나고 돌아오던 두 발을 묶였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은 조심스러워졌다. 내 일상이 달라져서, 그리워질 줄 몰랐던 그 순간들이 그리워졌다.


 오늘부터라도 퇴근 길에 하늘이라도 잠깐 올려 다 봐야겠다. 시간이 흘러 어느 먼 미래에, 어떤 순간에, 지금 이 순간이 그리워질지 모르니.




“부딪히는 바람도 평화롭구나

내 마음이 변해서 더 그런가 해

흔들리는 바람에 휘날리는 나무도

내 마음을 간질여

예전의 나를 돋는다”

- 폴킴 <초록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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