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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연 Mar 20. 2021

당신의 평행세계는 몇 개인가요

 한바탕 업무가 휘몰아친 뒤 고요해진 어느 날의 사무실 안. 나는 머리도 식힐 겸 옆자리 대리님과 영화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리님은 영화 중에 어떤 장르 좋아해요? 액션 영화요! 대리님은요? 저는 일단 여름이면 공포영화는 꼭 챙겨봐요. 어. 저돈데! 근데 고어물은 도저히 못 보겠더라고요. SF영화는 어때요? 저 SF영화 완전 챙겨보는데! SF영화를 챙겨본다는 목소리는 옆이 아니라 맞은편 파티션 너머에서 들려왔다. 최대한 조용한 목소리로 속닥거린다고 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인지 결국 이 대화에 맞은편 대리님들과 과장님까지 합세했다. 갑자기 시작된 영화 이야기는 지나가던 차장님의 발걸음도 멈추게 했다.


 “평행세계가 나오는 영화 있지? 나는 그게 제일 좋더라. 정말로 평행세계가 있다면 거기 있는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해. 좀 더 나은 선택들을 하면서, 좀 덜 후회하면서 살고 있을까.”


 지금의 자신보다 더 잘 살고 있으면 배는 좀 아프겠다며 너스레 웃음을 지으시던 차장님. 문득 평행세계는 과거의 내가 택하지 않았던 선택지들에 후회가 더해질 때마다 하나씩 만들어진다는, 누구인지 모를 어떤 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런 계산법이라면, 나는 지금까지 몇 개의 평행세계를 만들었을까. 이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속으로 답을 써냈다.


 - 아직까지는 없음.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그건 지금의 나는 ‘후회’와 ‘아쉬움’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둘의 차이를 깨닫은 건 불과 얼마 전, 고작 몇 달 전의 일이긴 하지만. 몇 달 전, 나는 20대로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묘한 걱정과 요동치는 긴장감 속에서 보냈다. 10년 동안 공들여서 친 시험의 결과를 확인하는 결전의 날. 그 날까지 디데이-7. 디데이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머릿속에서 ‘후회’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횟수는 늘어갔다. 디데이가 되었을 때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간들로 돌아가고 싶다고, 땅을 치며 절절히 후회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까 봐 진심으로 무서웠다. 그렇게 남은 일주일, 속이 타는 나와 다르게 시곗바늘은 더 빠르지도 더 느리지도 않게, 똑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그리고 12월 31일 23:59:59를 지나 1월 1일 00:00:00. 디데이가 찾아왔고, 나의 20대가 끝났다.


  순간 내가 확인한 감정은 다행히도 후회가 아닌 일종의 안도감이었다. 20대라는 인생의  챕터를 무사히  써냈다는  확인한 안도감. 100 만점에  점도 아닌, 합격 불합격도 아닌, 그저  ‘수료했음을 확인한 안도감.  안도감은 지난날의 내가 내린 선택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의미했고,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었다. 이때 처음으로 후회와 아쉬움이 다르다는  깨달았다.


 누구나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해 한번쯤 떠올려보곤 속으로 곱씹어본다. 그때 차라리 그걸 했으면 더 좋았을 덴데. 어쩌면 지금보다 더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남긴 거라 미련이 남고, 걸어보지 않은 길이기에 아름다운 수식어를 제멋대로 붙이며 동경한다. 미련과 동경, 그 둘이 모여 ‘아쉬움’이 된다. 그런 점에서 나의 20대에도 아쉬운 점은 많다. 조금 더 넓게 보며 생각할 걸, 조금 더 용기 내서 도전해볼 걸, 조금 더 여유를 가질 걸… 하지만 지난날의 선택에 아쉬움은 남을지언정 후회하지 않는 건, 나는 그 선택들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후회는 사전적 정의로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침’을 말한다. 과거에 한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전제로 하는 감정인 것이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라면, 그 결정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져왔다면, 그 선택은 늘 옳은 게 아닐까 싶다. 남겨둔 선택지가 더 나았을 거란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고, 신이 아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인 최선을 다한 것이기에. 그래서 20대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나는 매 순간 치열하게 고민하며 최선을 다해 선택하려고 한다. 언젠가 40대가 되었을 때 30대에 했던 선택들을 후회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고 말할 수 있게끔.


 “평행세계에 있는 내가 더 잘 살고 있는데, 바꾸자고 하면 바꾸실 건가요?”


 나의 질문에 차장님은 바로 대답하셨다.


 “아니. 지금도 나쁘지 않거든. 나름 괜찮아.”


 - 차장님의 평행세계도 아직까지는 없음.




“난 넘어질 때도 있겠지

날 넘어뜨렸던 순간들조차도

소중한 기억들로 이 순간

Breeze Breeze Breeze

크게 숨 들이쉬고

Breeze Breeze Breeze

0부터 시작될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

- 태연, 멜로망스 <Page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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