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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연 Jun 21. 2020

오후 3시의 잔치국수

 사람들마다 세상으로 내보내는 SOS 신호는 제각기 다르다. 나 힘들어! 나 좀 도와줘! 라며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 속을 휘젓는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묵묵히 홀로 감당해내는 사람도 있다. 나의 SOS 신호는 솔직하지도 뚝심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혼자서 힘듦을 감당하기엔 버겁고, 그렇다고 도와달라 위로해달라는 말을 꺼내기엔 얄팍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그런 자존심을 가족들 앞에서까지 부렸던 내가 선택한 SOS 신호는 이거였다.


“있잖아, 나, 그게 먹고 싶어.”


 몇 년 전, 어느 여름 날이었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겨우 고향에 도착했다. 전혀 계획에 없던 고향 방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시험과 면접, 합격과 불합격의 쳇바퀴 속에서 쉴 틈 없이 달리던 취업준비생이었다. 지금은 어느 회사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래도 그 당시엔 정말 가고 싶었던 한 회사의 최종면접에 불합격했다. 그날 오전 불시에 날아든 불합격 메일. 이번 한 번만 더 합격이면 끝인데, 정말 끝인데. ‘안타깝지만’으로 시작한 불합격 메일은, 결승점이 보인다고 생각했던 취업이라는 트랙 위를 다시 달려야 한다는 절망감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절망감은 나 스스로를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자책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절망감과 비참함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나는 그날 고향으로 향했다.


 버스터미널을 빠져나오자 여름 날의 늦은 오후라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후덥지근한 날씨 탓인지 그때의 우울했던 심정 때문인지 아침도 점심도 걸렀지만 배가 고프진 않았다. 그래도 뭐라도 먹긴 먹어야지 싶어서 김밥 한 줄을 사고는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그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할머니댁 근처 정류장이 나오는데, 문득 여기서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 순간 할머니가 보고 싶었고, 할머니를 보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았다. 할머니댁에 도착하니 어김없이 대문은 온 동네 이웃주민들 위해 활짝 열려 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할머니는 뒷짐을 지신 채 마당 한쪽 화분에 심어진 쪽파를 보고 계셨다. 예상하지 못한 손녀딸의 등장에 할머니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그리곤 곧바로 손에 쥔 검은색 비닐봉지를 보시곤, 점심 아직 안 먹었냐고 하셨다. 순식간에 할머니 이마 위로 근심들이 줄을 섰다.


 끼니를 거른 게 들통 나 머쓱하게 웃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는 뭐가 먹고 싶냐고 물으셨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할머니가 보고 계시던 쪽파가 송송 들어간 양념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양념장이 들어간 할머니표 잔치국수가 먹고 싶었다.


“할머니, 나 잔지국수 먹고 싶어.”


 그리고 대답하자 마자 ‘아차’ 싶었다. 국수만큼 손이 많이 가고 번거로운 음식이 또 없는데, 그냥 김치에 김밥 산 거 먹으면 된다고 할껄. 어리광 부린 스스로를 자책하려는데, 할머니는 어디선가 가위를 꺼내 와 화분 속 쪽파를 이미 숭덩숭덩 자르고 계셨다. 한 움큼 쪽파를 챙긴 할머니는 손녀딸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셨다.


 부엌 식탁에 앉아 잔치국수를 만드는 할머니를 바라봤다. 금방 만든다던 할머니의 말씀과 달리 역시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김치냉장고에서 꽁꽁 언 멸치육수 통을 꺼내 국자로 얼음을 깼다. 그 사이 물이 팔팔 끓는 냄비로 소면이 들어갔다. 냄비 옆 큰 화구에는 후라이팬이 올라갔고, 다시 그 위로 흰자 계란물이 한 번, 노른자 계란물이 또 한 번 차르륵 소리를 내며 덮어졌다. 어디 하나 찢어진 곳 없이 예쁘게 구워진 지단 2장. 할머니는 배고플 손녀 때문에 마음이 급해져 다 식지도 않은 지단을 돌돌 말아 채를 썰었다. 도마 한 켠으로 채 썬 지단들이 수북히 쌓여갔다. 수북히 할머니의 사랑이 쌓여갔다.


  익은 소면은 냄비에서 나와 은색 스뎅 그릇 속으로 돌돌 말려서 들어갔다. 잠시 면이 식을 동안 냉장고에서 김치랑 애호박 볶음을 꺼냈다. 조금 덜어낸 김치는 잘게 다진  설탕 조금, 참기쪼르륵, 참깨 술술 넣어 섞어주었다. 애호박 볶음은 반찬통에서 꺼내어 채를 썰었더니, 순식간에 잔치국수에 올라갈 애호박 고명으로 탈바꿈했다. 얼음이 살짝 녹은 육수에  물을 부어 간이 맞춘  소명 위로 부었다.  다음 지단, 김치, 애호박 고명을 차례대로 올려주었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잘게  쪽파가 들어간 양념장이  숟가락 올라갔다. 잔치국수  그릇이 완성됐다.


 부엌 옆 작은 식탁 위에 잔치국수 한 그릇과 김밥 한 줄을 놓아두고 먹기 시작했다. 다른 반찬 없어도 된다고 했지만, 냉장고에서 하나 둘 반찬들이 나왔다. 도라지 무침, 아직 내 입맛엔 쓰고 질긴 가죽나물무침, 텃밭에서 따온 깻잎으로 만든 깻잎장아찌. 순식간에 진수성찬이 되었다. 잔치국수 한 젓가락, 김밥 하나, 그 위로 할머니가 올려 주신 밑반찬 한입. 볼 양쪽이 가득 차게 먹는 손녀를 보며 할머니는 계속 미안해하셨다. 오랜만에 보는 손녀에게 차려준 끼니가 고작 잔치국수라서 미안하다고. 나는 눈물이 나려는 걸 참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 애먼 국수그릇만 연신 휘저었다. 그리곤 더 크게 한 젓가락을 집어 들고는 잔치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워냈다. 아이고 울 손녀 잘 먹어서 좋네, 할매가 다음에 더 맛있는 거 해줄게. 잔치국수 한 그릇에, 내가 다 갚지 못할 할머니의 사랑이 가득했다. 이 사랑을 받아도 될 만큼 나는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평범한 여름 날의, 특별할 것 없는 어떤 날의 오후 3시의 일이었다.


 그 날 먹었던 잔치국수는 그 한 해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게 해준 힘이 되었다. 그때 그 맛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마음 한 켠에 자리잡아, 위로가 필요한 어느 힘든 날, 문득 떠올라 살아갈 힘이 되어주겠지. 아무래도 그게 사랑인 거겠지.


 여름이 지나기 전에 고향에 내려가 할머니랑 잔치국수 한 그릇 후루룩 해야겠다.





“I know you’ve seen all my imperfections

You’ve seen all my rough

You’ve seen that I ain’t that perfect

Still you give me love

You stand by me

Through the longest nights”

- John Newman <Stand by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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