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2월 13일,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은 2002 FIFA 월드컵 유치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주앙 아벨란제 당시 FIFA 회장이 "21세기 첫 번째 월드컵은 아시아에서 개최한다"라고 판을 깔아 둔 상태였다. 이 판 위에서 일본은 이미 월드컵 유치 활동 중이었다. 아벨란제 회장은 일본을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FIFA가 만들고 일본이 춤추던 판 위로 한국 축구가 뛰어들었다.
주앙 아벨란제 회장은 생각보다 더 노골적으로 일본을 지지했다. 아벨란제가 1995년 5월 취리히 FIFA 하우스 집행위원회에서 2002 FIFA월드컵 월드컵 개최지를 조기에 결정하는 안건을 상정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국과 일본 유치경쟁이 지나치게 과열됐다는 이유였다. 월드컵 개최지는 1996년 6월 결정하기로 돼 있었다. 한국이 치고 오르는 상황을 정리하고 개최지를 일본으로 못박기 위한 작업이었다.
당시 FIFA하우스 로비에 일본축구협회 부회장 무라타 다다오와 교토통신 런던 주재기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을 보자 “조기결정안이 통과되었냐”고 묻는다. 이미 일본이 조기결정 의제를 알고 있었다고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주앙 아벨란제 FIFA회장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일본을 지지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1996년 5월 31일 한국은 FIFA 월드컵 유치에 성공한다! 공동개최였지만. 어쨌든! 메가 이벤트 19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한 지 8년 만이었다. 당시 한국 축구는 1986 멕시코 1990 이탈리아 1994 미국까지 3회 연속 FIFA 월드컵에 진출하며 아시아 강호로 자리 잡고 있었다.
꾸준한 월드컵 출전과 별개로 국내 축구 인프라는 척박했다. 월드컵 유치가 확정됐을 때 국내에 축구전용구장은 포항과 광양이 전부였다. 정몽준 당시 회장도 유치가 확정된 후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전용구장 확보’를 언급한다. 축구장 인프라뿐 아니라 프로리그도 사정은 비슷했다. 1996년 K리그는 출범 10년이 넘도록 참가 팀이 두 자리를 넘지 못한 9개 팀이 다투는 무대였다. 출범 4년 차를 맞은 당시 일본 J리그는 이미 16개 팀이 다투는 프로리그를 구축해 놓은 상황이었다.
메가 이벤트 월드컵 유치에는 성공했지만 시설 행정 마케팅 등 준비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였다. 가뜩이나 일본과 공동개최로 자존심을 세워야 한다는 경쟁심리도 깔려있었을 1996년, 산 넘어 산이었다. 이 즈음 스포츠 마케팅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스포츠 마케팅 거물 마크 매코맥(Mark McComack) IMG회장이 한국을 찾는다.
마크 매코맥은 유치가 확정된 1996년 11월 한국을 찾았다. 그는 김영수 당시 문화체육부장관, 정몽준 당시 축구협회장과 만나 무사히 산 넘는 법을 전수한다. 마크 매코맥은 11월 22일, 이런 인터뷰를 남긴다.
"한국프로축구연맹과 계약한 5년 동안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먼저 단일리그제 도입, 유럽 FA컵 방식의 챌린지 트로피, 슈퍼컵 시리즈 등이 내년부터 시도될 것이며 각종 수익사업도 전면적으로 펼쳐져 적자에 허덕이는 프로축구단들의 고민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타이거 우즈(골프), 미하엘 슈마허(F1), 찰스 바클리(농구), 데릭 지터(야구) 등 종목 불문 세계적 스포츠 스타들을 고객으로 뒀던 그의 입에서, ‘유럽 FA컵 방식의 챌린지 트로피’라는, FA컵이란 단어가 직접 언급됐다.
마크 매코맥은 '내년'이라고 언급했지만 기자회견 8일 후인 11월 30일, 제1회 대한축구협회 FA컵이 경남 진주에서 개최됐다. 마크 매코맥이 언급했다고 8일 만에 대회를 후다닥 준비해 치를 수는 없었을 텐데...
대한축구협회는 한 해 전인 1995년 FA컵 대회를 도입하려다 무산된 바 있었다.
1996년 FA컵 대회는 도입을 시도했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게 합리적일 듯하다.
아무튼. 대한축구협회 FA컵은 1996년 대회를 원년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5년 연장선이든 1996년 말 한마디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현재 협회가 1996년을 '원년'으로 삼고 있는 FA컵 대회는 2002 FIFA 월드컵 유치 흐름 위에서 탄생했다.
1996년은 그렇게 원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