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FA컵 1996년 프로리그 1983년
중국 FA컵 1995년 프로리그 1994년
일본 FA컵 1921년 프로리그 1993년
잉글랜드 FA컵 1871년 프로리그 1888년
스코틀랜드 FA컵 1873년 프로리그 1890년
네덜란드 FA컵 1898년 프로리그 1956년
스페인 FA컵 1902년 프로리그 1929년
프랑스 FA컵 1918년 프로리그 1932년
이탈리아 FA컵 1922년 프로리그 1929년
독일 FA컵 1935년 프로리그 1963년
한국 축구가 "중국과 함께 FA컵 역사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의문점을 풀기 위해서는
대한축구협회의 FA컵 소개를 참고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부터 열린 전조선축구대회와 해방 후 1946년부터 열린 전국축구선수권대회를 전신으로 한다.
일제강점기 축구 역사를 살펴보며 한국 축구의 뿌리 '전조선축구대회'를 살펴봤다.
한국 축구 뿌리와 나란히 언급되고 있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어떤 대회였을까?
한국 최초의 축구대회 이름은 '전조선축구대회'였다.
이 대회는 조선체육회가 종목들을 한 데 추려 만든 '전조선종합경기대회'로 흡수된다.
조선체육회가 해산당하자 축구협회는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며 대회를 계승했다.
해방 후 1946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기존에 사용하던 명칭 '전조선' 대신 '전국' 이란 이름으로 대회를 개최했다.
지금이야 '전국'이라는 단어가 그리 낯설지 않다.
해서 대회 명칭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1945년 12월 다시 조직된 축구협회의 이름은 조선이었다.
조직은 기존 이름 조선축구협회를 사용했으면서
왜 1946년 개최한 대회 이름은 전조선을 쓰지 않았을까?
해방 후 일제가 물러나며 만든 권력의 공백은 혼돈을 야기했다.
38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에 주둔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신탁통치안'이 전해지자 사회는 급격히 소용돌이쳤다.
신탁통치 찬성(찬탁), 반대(반탁)를 기준으로 사회가 둘로 쪼개진다.
반탁운동을 전개한 이들은 찬탁을 곧 매국으로 간주했고, 그 해에 고하 송진우가 테러로 목숨을 잃는다.
이 후로도 거물급 인사들을 향한 테러 위협은 계속 이어졌다. 분단의 암운이 드리우던 시기. 나라가 38선을 따라 쪼개지는 건지,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국가가 수립이 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국가의 이름은 무엇인지. 모든 게 의문이었다.
8.15 광복 후 해방정국 기간 존재했던 정당 중 일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공산당, 고려민주당,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
조선민주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남조선로동당.
정당은 사회 각계각층의 사회적 요구를 담아 탄생하며 이름은 그 뜻을 담곤 한다.
한반도 역사 속에서 국호로 사용됐던 '한, 조선, 고려'를 사용하는 정당히 무수히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후 한반도를 어떤 사회로 만들 것인지를 두고 얼마나 치열한 고민들이 전개됐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해방정국은 미국과 소련이 갈라놓은 물리적 남북과 각자의 이상, 혹은 욕심을 구현하려던 거물들의 사상적 좌우가 합종연횡을 거듭하는 활극이 펼쳐진 무대였다.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복잡다단한 시대. 기존에 사용하던 대회 이름 '전조선(全朝鮮)'보다는 '전국(全國)'이 당시 축구협회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단어였던 듯하다. 조직 이름은 여전히 조선축구협회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다시 축구대회가 열렸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전쟁이 발발했다. 온 나라가 전쟁터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정부는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에 자리 잡는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을 되찾지만 1951년 1·4 후퇴 때 다시 서울이 함락된다. 부산으로 다시 한번 내려갔다. 휴전협정이 발효될 때까지 부산에 계속 머물렀고, 1953년 8월 15일 서울로 환도한다.
정부도 피난 중인데, 축구협회라고 오죽했을까. 1·4 후퇴 당시 축구협회도 부산으로 피난길에 나섰다. 당시 부산시 광복동 대한체육회 연락사무소에 '책상 1개'를 마련해 축구인들의 동정을 파악했다고 한다.
전쟁, 책상 1개가 축구협회였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전국축구선수권대회가 열린다. 1950년은 대회를 개최하지 못했지만, 1951년 10월 6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수많은 축구인들이 다시 한 데 모이는 계기가 됐고 군과 민간 기업체에서 축구팀을 창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다음 해인 1952년에는 대구에서 대회가 열렸다. 한국전쟁이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공방을 주고받는 고지전 양상에 접어든 시기였다. 경상도 일대에서 대회가 열릴 수 있었던 배경이다.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이어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당시 축구인들의 피와 땀, 나아가 민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의 흔적을 품은 전국축구선수권대회는 1946년부터 2000년까지,
50년 넘게 이어진 해방 후 한국 축구의 산실이자 중추였다.
※ 혹 전조선에서 전국으로 바뀐 대회 명칭을 두고 별도의 설명이 있는지 신문 자료와 몇몇 서적을 참고했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해서 '전조선'이 '전국'으로 바뀌는 이유는, 시대상에 비춰 해석해 본 '추정'이다.
전쟁 기간 대회 장소 및 일정 등은 아래 기사 및 도서를 참고했다.
「대한축구협회大韓蹴球協會今年度(대한축구협회금년도)事業 計劃案發表(사업계획안발표)」, 『동아일보』, 1950년 2월 18일.
「축球選手權大會(구선수권대회) 十月六(십월육)일에 開幕(개막)」, 『동아일보』, 1951년 9월 16일.
「六回全國蹴球(육회전국축구) 選手權大會(선수권대회)」, 『동아일보』, 1952년 11월 10일.
박경호·김덕기 『한국축구 100년 秘史(비사)』, 2000년, 책읽는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