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라는 감정에 집중을 하자 나의 과거가 보이기 시작했다.
종종 블로그에 어렸을 때부터 나의 메인 감정은 분노였고,
그 분노의 기저에는 슬픔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글을 적곤 했다.
그리고 최근 찾아낸 분노의 기저에 또 다른 감정이 있다.
바로 질투심.
생각해 보면 질투심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경험했던 것 같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유아기부터.
아마도 남동생의 존재가 생기고
남동생에게 나의 사랑을 모두 빼앗긴다는 생각에서
늘 남동생에게 질투를 경험하곤 했는데
그 질투를 내비치는 것이 내게는 굉장히 힘든 숙제였다.
질투를 느끼는 내가 진 것만 같은 느낌을 불러왔고
특히 나보다 더 어리고 약한 존재인 동생에게
이것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부정적 감정에 계속 휩싸여 있다 보니
나는 동생에게 툭하면 손, 발이 나가고
툭하면 말로 비비 꼬며 동생을 건드렸다.
그런 내게 엄마는
옆에서 살살 사람 속을 긁어 놓는
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당시엔 나도 억울했다.
동생에게 부정적 감정이 쌓일 대로 쌓였지만
질투와 시기에 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말을 하지 못하니
행동으로 표출이 되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그저 이유도 없이 동생을 괴롭히는 애
정도로 봤다.
왜 그랬냐는 윽박지름에도
꿋꿋이 입을 꾹 닫은 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내 질투심을 들키는 순간 지는 듯한 느낌,
그 이상의 비참함을 경험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늘 동생을 이유 없이 괴롭히는 얄미운 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의 최초 기억인 4~5세경부터
이미 나의 메인 감정은 질투였던 것 같다.
이후 자라오면서 내가 부정적 감정을 경험할 때면
대부분은 '질투'의 감정을 동반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딱히 들여다보려 노력하지 않았기에
질투라고 당시에는 생각지 못했지만
지금에야 돌아보면 나는 질투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블로그 글에 험담을 하는 나에 대해,
아이들을 괴롭히는 나에 대해,
타인을 지나치게 통제하려는 나에 대해서도
글을 적어둔 것들이 있는데
당시에 설명되지 않던 많은 부분들이
질투심이라는 단어로 연결고리를 찾은 듯하다.
질투심이라는 감정은 나를 늘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질투라는 감정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는
늘 나는 남들보다 우위에 있어야 했고
늘 남들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어야 했다.
늘 남들을 리드하고 이끌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날 조금이라도 낮은 위치로 끌어내리는 듯한 대상을
(물론 그들에겐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 나 혼자만의 느낌일 뿐)
나는 험담하고 헐뜯었다.
험담을 하며 그 사람을 내리깔면
마치 내가 그 사람의 우위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혹은 그 사람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도 들었다.
험담뿐만 아니라 앞담화도 잘했다.
대놓고 타인을 무안하게 만들기도 하고
험담의 내용을 앞에서도 그대로 쏟아내곤 했다.
그럼 나는 그들에게 지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타인을 통제할 때면 우위에 있는 느낌을 가지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연중 그 사람보다 내가 낫다는 느낌을 종종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타인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리 끌고 저리 끌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나서는 것 좋아하고
리드하고 이끄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수용적이고 때론 순종적인 사람들이었다.
군말 없이 내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와 주는 이들.
나의 질투심을, 통제감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나의 통제욕을 채웠다.
하지만 사람이란 것이 내게도 그러하면
다른 이에게도 그런 특성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타인에게도 똑같이 금세 소속됐고
나는 나의 손아귀를 빠져나간 듯한 느낌에
그들에게 배신감과 질투를 느끼곤 했다.
사실 그들은 내 소유도 아니고,
또 그들 역시 자아가 있고,
그들의 특성이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작용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임에도
나는 그러한 것들을 둘러볼 틈이 없었다.
그저 내게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질투와 시기를 강하게 느끼고서
내가 성격으로 굳혀 버린
자동화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자동화된 반응이라 함은 대부분
질투심을 숨기고 쿨한척하지만
부정적 감정이 해결되지 않아
상대에게 얄궂게 군다든지,
차갑게 대한 다든지,
의도를 가지고 은밀하게 모임에서 제해 버린다든지
혹은 험담, 앞담화를 하는 유치한 대응이었다.
이러한 반응은 최초 기억인 4~5세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솔직한 심정을 말하지 못하니
부정적 감정을 배배 꼬아 어떻게든
공격적인 형태로 처리해 버리곤 했다.
그리고 당시 그것의 대상은 대부분 남동생이었다.
질투심은 나를 영악하게 만들었다.
어디 가서 절대 손해 보는 일 없고
어디 가면 꼭 리더의 역할을 하곤 했다.
무엇 하나 무서울 것 없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사람들은 강인하게 봐주었다.
하지만 질투심은 나를 편집증적으로 만들고
늘 타인과 환경을 탓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공격적이고 통제적이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수치스럽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질투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똑바로 직시하고 공개적으로 질투심에 대해 알린다는 것은
더 이상 나는 수치스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나는 질투심에 취약하다.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의 대부분은
질투라는 감정이 건드려져 올라왔던 것을 알게 되었고
의식적으로 이젠 질투심을 자각하고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나는 친한 엄마들에게 질투심을 또 한번 느꼈다.
그리고 매우 자동화된 대처 전략을 사용하기 이전,
그 감정에 대해 가만히 들여다 보고
나 스스로를 다독이고
조금 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며
질투심을 다루고 대처전략을 수정할 수 있었다.
만연하게 패턴화된 나의 질투심에 대한 반응들을
캐치하고 잡아내어 좀 더 적응적인 방식으로 수정할 수 있었다.
더이상 나는 나의 질투심이 수치스럽지 않다.
이제 질투심은 내게
타인의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늘 이겨야만 한다는,
타인을 통제해야만 한다는
그러한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해주는 하나의 시그널이 되었다.
마치 나의 잘못된 생각들이 일어날 때면
강한 경고음을 내며 내게 알려주는 신호가 되어
나의 생각과 행동을 더욱 잘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래서 인간은
결핍이 있어야 하고,
실수해야 하고,
실패해야 하고,
수치스러워야 하고,
불안해야 하고,
완벽하지 않아야 하나보다.
이러한 결핍들이 결국 인간을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