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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은 타인의 기대를 부른다.

by 김수빈

뭐 그 시절 엄마들이 모두 희생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울 엄마는 특히나 희생의 아이콘과 같았다.


실제로 보여지는 모습도 그러했고

괜히 아빠의 자리를 엄마가 대신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정말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엄마가 담당하였고

엄마가 실질적 가장, 아니 그냥 대놓고 가장이라해도 무방했다.

이건 아빠도 백번천번 동의할듯하다.


엄마는 수십년을 쉬는 날이 단 하루도 없는 공장을 다니며 교대근무를 했다.

쉬는 날이 없다는건 야간반이 끝나고 오후반으로 넘어갈때면 오전 8시에 집에 와 1시에 출근을 하는 생활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그럼 씻고 준비하고 어쩌고 저쩌고 자시고 하면 하루에 3~4시간 겨우 자고 다시 또 일터로 나가 밤 11시가 되어야 겨우 일이 끝난다.


몸 편히 앉아서 하는 일도 아니다.

한겨울에도 반팔을 입고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해야 하는 고된 육체노동이었다.


나는 정말 엄마를 리스펙한다.

아무리 엄마를 닮은 나라지만

과연 엄마처럼 살 수 있었을까.

절대 못하지 싶다.


그렇게 수십년을 쉼없이 달리면서도

위염에 장염이 와도 꾸역꾸역 출근해서

맥아리없는 몸으로 일을 하고,

일하는 도중 수번을 화장실에 달려가 구토를 하면서도 결근이나 지각 한번 하지 않던 사람이다.


근육통에 밤새 아파서 혼자 끙끙 앓으며 눈물 흘리던 엄마는

다음 날도 잠 한번 못잔 채로 회사를 나갔다.


입에 풀칠하기 힘들었던 시절이었고

아빠는 돈을 벌기는 커녕 날려먹는 중이었고

아이 둘을 책임져야만 했던 엄마는

회사에서 절대 짤리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어마무시한 책임감으로 회사를 다녔더랬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을 사람이었다.

한치의 고민도 없이.

자신을 갈아넣어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를 지켜냈다.


누가보면 미련하고 어리석게 일을 했다고 하겠지만

나는 그런 엄마의 희생과 헌신을 보며

엄마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사랑은 저렇게 하는 거구나.


그래서 나는 엄마를 보며 애정을 학습했다.

누군가를 애정할 때는 헌신으로 표현했고,

또한 타인의 헌신 역시 애정으로 받아들였다.

아이를 양육함에 있어서도 나는 헌신적이었다.

그래서 나의 사랑의 언어는 헌신이다.


스킨쉽도, 선물도, 언어표현도 그 무엇도 나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기념일을 챙기지 않는건 내게 전혀 타격감이 없다.

그래 챙기지 않을 수도 있지.

나 역시 기념일 챙기는걸 약간은 쓸데없는 일로 치부하고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내게 있어 봉사를 하지 않는 것은 애정이 없다를 넘어선 어쩔땐 공격 행위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의 사랑의 표현은 헌신이었기 때문에.


비단 이성적 관계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애정하는 모든 주변인들에게 그러하였다.

비언어적 메세지는 또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사회적 민감성을 타고 났다.

말안해도 알아서 딱 잘 알아차리는 기깔나는 민감성이었다.

기질적으로 타고난건지, 타인에 대한 헌신을 위해 장착하게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타인이 부족한 것, 타인이 원하는 것, 타인이 힘든 것 들이 쉽게 레이더망에 잡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려워 하거나 힘들어할 때면

말하지 않아도 나서서 묻지도 않고 행동으로 실천했다.

소위 오지랖을 부렸다.


애정하는 이에게는 더욱 그러하지만

애정하지 않더라도 친해지고픈, 가까워지고픈 사람들에게도 그러했다.

그냥 내가 대인관계를 맺는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져 있었다.

나는 타인이 원하든 원치않든 먼저 나서 돕는 사람이었다.

어찌보면 해결해주는 사람.

또 어찌보면 책임져 주는 사람.

어찌보면 타인이 코에 손 안대고 코 풀도록 하는 사람.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은연 중 내게 기대를 가졌다.

먼저 도움을 청하지도 않는다.

은근히 단서만 던져도 덥석 물어 해결해준다.


그러다보니 나는 가까운 이들에게 봉사를 많이 실천했다.

도움을 먼저 구하지도 않았는데

문센을 같이 다니는 동네 엄마들을 내가 태워 다닌다던지,

맛있는게 생기면 나눈다던지,

아이 친구 엄빠가 맞벌이라 내가 봐준다던지,

사실 한두번이면 쉽지

이런 일을 하루이틀이 아니라 몇달씩 해줄 때도 있었다.


그러다보면 처음엔 고마워하던 이들도

나중에는 자연스레 당연한 것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당연하게 내게 얻어가고는

이후 내게 베풀 기회가 주어져도 베풀지 않을 때

나는 빡이 치곤 했다.


예를 들면 내가 한참을 태워 다니던 엄마가

내가 차가 없던 날 남편의 차를 타고 혼자 휑하니 가버린 순간 같은 것들.

그럴 때면 나는 속에서 배신감과 분노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얻어 탔으면서 정작 내가 필요할 땐 돌아오는게 하나 없다는 생각에서.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엄마는 내게 먼저 태워달라고 청한 적이 없었다.

내가 내 욕구로 이것저것 나서서 해줬으면서

그 엄마에게 그러니 너도 당연히 한번쯤은 날 돕겠지 라고 기대했던게 문제였다.


내가 그 엄마를 애정했던 방식은 봉사였을지라도

그 엄마는 내게 같은 방식으로 애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언어로 돌아오지 않는 것에

나는 배신감을 경험했다.


이처럼 누군가를 순수한 의도로 돕고 희생하고 헌신하면서도

그들이 이를 고마움 없이 당연히 여기거나

이를 넘어서 이제는 당당히 요구까지하면 나는 매우 공격적으로 변하곤 했다.

이것이 내게 건드려지는 트리거였다.

나의 헌신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일, 더한 요구를 하는 일.


그래서 나는 결혼생활에서도 트러블이 있곤했다.

헌신이 일상인 나와

그러한 헌신을 당연스레 받는 남편.

(남편은 어머님의 희생이 온 가족에게 당연시 되는 집이었다. 어머님에게 미안함 없이 당연하게 그녀의 헌신을 받는다. 매우 당당히)

그러한 남편의 당당히 받고는 고마움 하나 없이 이를 돌려줄줄 모르는 태도에 나는 자주 빡이 쳤다.

지금도 틱틱 대며 남편을 깔때면 그러한 태도가 내게 은연 중 쌓인 상태인 것.


하지만 남편은 내게 누가 너한테 그렇게 해달랬어? 니가 원해서 해놓고는 왜 날 탓해?

였다.

물론 일부는 맞는 말이었다.

남편은 내게 언어로는 요구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직접적이고 직설적인 요구는 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비언어적 메세지로, 혹은 완곡히 내게 표현하곤 했다.

소위 떡밥을 던지고 물길 바랐다.

물론 남편의 무의식 중 행동이자 패턴이기에 무언가를 의도하는지 스스로는 몰랐을 거다.

아이가 학원에 잘 도착했는지 걱정이 될때면 슬쩍 내게 흘린다거나 "학원에 연락해 봐야 하는거 아닌가...?"

직접 하라는 지시는 없다. 부탁도 없다.

혼잣말처럼 옆에서 중얼댄다.

마치 물으라는 식으로.


이전엔 이러한 패턴에 나도 소위 끌려가듯 먼저 캐치하고는 선뜻 무언가 원하는 바를 들어줬다.

말만 흘려주면 행동으로 나서는 사람이니 남편 입장에서는 손안대고 코풀기였다.(시댁 가족들의 패턴이 여기서 드러난다.)

하지만 이러한 나와 남편의 패턴을 인식하고는 이후부터는 떡밥을 던져도 물지 않기 시작했다.

그럴때면 남편은 두번, 세번 내게 떡밥을 더 던져보는 행동들을 하더라.

그럼 나는 또 답답해져서 "그럼 학원에 전화해보던지" 라고 말을 하며 남편의 욕구에 대해 니 욕구잖아 라고 되받아치며 돌려준다.

그리고 내가 세운 경계에 남편은 더이상 요구하지 않고 물러나 아무것도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즉, 내가 해주길 바랐다는 것.


그러면서도 남편은 내가 언제 너에게 해달랬냐 모드로, 헌신 이후 돌아오지 않는 헌신에 화를 내는 내게 이야기 했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둔 것이다.

하지만 저 행동들만 봐도 남편은 직접적 요구만 하지 않았지, 간접적으로 완곡하게 우회해서 비언어적 메세지로 표정과 태도에서 이미 내게 무언의 압박을 계속해서 넣고 있는 것이었다.

교묘하게. (난 이러한 표현을 매우 답답해 한다. 직설적인 사람이라)


엄마의 헌신을 아빠는 매우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무능력하고 무책임하게.

하루는 술을 드시고 말씀하셨다.

엄마가 있으니 믿고 일을 벌인 것도 사실 맞다고.

그때도 참 화가 났더랬다.

희생하는 사람은 평생 희생만 하고,

그에 편승하는 사람은 평생 받기만 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일방적 헌신에

엄마는 자주 역정을 내곤 했다.

아빠의 태도에 크게 분노하고 싸움을 일으키곤 했는데,

그러한 부부 사이의 패턴은

나와 남편의 패턴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엄빠처럼 자주 싸우진 않는다.

크게 싸우지도 않는다.

상담을 하며 그래도 나름 조절을 하고 있기에

싸움의 정도나 빈도는 훨씬 낮지만

내게 건드려지는 그 부분이 엄마의 그것과 같았다.


왜 갑자기 희생과 헌신, 책임에 대해 이렇게 길게 이야기 했냐고?

내 역전이가 건드려진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담자에게도 지나친 헌신을 한다.

엄마 없는 내담자가 방학 내내 식사를 거르고 온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내담자에게 줄 김밥을 열심히 싸서 상담에 갔다.

아이가 안쓰러웠다. 돕고 싶었다. 속상했다.

날 통해서라도 따뜻함을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나는 역전이를 경험하게 한 보호자와 그 보호자의 자녀에게도 헌신적이었다.

상담사로서 경계를 넘어선 어떠한 헌신을 실천하고 있었다.

단순 상담센터가 아니라 상담복지센터이기에

이곳의 경계는 참으로 모호하긴 하다.

상담 이외의 복지 영역에 손을 뻗쳐도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상담 마치고 내담자를 집에 태워다 주기도 하고

카페에서 음료를 사주기도 했다.


그래서 이 보호자와 내담자에게도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그 보호자는 내가 싫어라하는 아주 당연히 받는 사람, 그리고 그 당연함까지는 좋았다.

그건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으나

나의 의무가 아닌 배려 행동에 그 엄마는 무언가 기대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그 배려보다 더한 요구들을 하기 시작했다.


요구적으로 상담사가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당당히 바랐고, 나의 거절에 화를 내며 계속된 탓을 했다.

그렇게 내가 가장 공격적이되도록 자극하는 그 행동들을 내게 보였다.


나는 타인의 그러한 태도에 늘 날이 서서 공격적이 되던 사람이었다.

세상 순하고 선하다가도 상대의 태도에 180도 바껴 어쭈 이것봐라? 하며 매우 공격적으로 돌변한다.

즉, 상대의 그러한 태도를 나는 공격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의 역전이가 시작되었다.

머리로는 알아차려졌지만,

제어가 되지 않았다.

나의 가장 민감한 부분이 건드려졌기 때문에.


눈 한번 딱 감고 들어줘도 될만한 문제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를 수용할 주변 동료 몇몇이 떠올랐다.

그런데 일차적으로는 내가 이를 들어줌으로서 보호자의 역기능적 특성을 반복되게 할 수 있어서 들어주지 않아야 한다는 맘.

또한 내담자에게 해가 될 것이라는 맘.

마지막으로는 보호자와 내담자를 떠나 나의 건드려진 그 부분때문에 이상한 똥고집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눈 딱 감고 들어줄 수도 있지만 당신이 원하는거 절대 못줘. 안줘! 하고 말이다.


그렇게 수퍼바이저에게 바로 전화를 해서 당장 도움을 요청했다.

내담자에게 해가 될까 두려웠고,

내담자의 환경을 내가 오염시킬까 두려웠다.


그리고 상담에서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아직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으나,

곧 옮길 수 있다는 위험이 감지 됐기 때문에.

상담사의 윤리에 따라 이러한 상황에서

곧바로 교육분석을 신청했다.

이건 아주 잘한 선택이었고, 상담사의 윤리강령에 따라 잘 처신한 일이었다고 자부한다.




또 글이 길어진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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