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날씨가 제법 쾌청하고 더위는 살짝콩 올라온 날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이른 아침 가볍게 러닝을 뛰며 오늘의 오후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준비한 자료들이야 회사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학생들에 맞게 워싱한 수준이라 어렵지 않고 이미 한 번 걸어본 발표자리라 괜찮을 것이라 스스로 다독여봐도 또다시 아기새 마냥 콩닥콩닥콩닥콩닥 뛰는 긴장감은 쉽게 누그러지질 않았다. 잘 준비한 것 같다가도 다시 보니 그저 허울 좋은 소리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른들이 생각하는 AI의 기대치 대비 현재의 성능은 아직인 반면에 이것을 설명하자니 대체가 아닌 서브 정도인데 뭔가 휘황찬란하게 포장해서 설명하는 것 같은 회의감과 고민들이 밀려왔다. (글을 쓰다 보니 불안감에 자주 사로잡히는 나ㅅㄲ인 것 같다) 그나마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것이 있다면 발전될 미래 기술이고 사용감을 익혀둬서 나쁠 것이 없다는 게 나의 견해이다. 좀 더 깊이 파본다면 기업의 가치라던가 투자에 대한 전략 방향을 좀 더 디테일하게 조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지 않을까?(아님)
숨 가쁘게 밀려온 고민과 들이찬 땀으로 얼룩진 몸을 씻어내곤 갈 채비를 시작했다. 내 나이 34세 Babe...
너무 올드하진 않으면서 과하게 캐주얼하지도 않게 적당히 펑퍼짐한 옥스퍼드 와이드 셔츠에 발목 위까지 슬쩍 보이는 회색의 슬랙스, 너무 딱딱해 보이지 않게 귀여운 양말에 로퍼를 신어준 후 나름 친화력 있어 보이게끔 그린색 계열의 니트 넥타이까지 정성스레 둘러보았다. 조금 투머치 한 가? 싶었지만 그래도 모양 빠져 보이는 것보다야 낫겠지.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영 가볍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바람덕에 그렇게 무겁지만도 않았다. 우리 집은 서울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서 가볍게 내려가 마을버스를 탔다. 2시 수업에 조금 일찍 12시 정도 즈음 넘어서 도착했던 것 같다. 어릴 적에 집이 가까워 어머니와 놀러 올 때면
"공부 열심히 해서 우리 아들 서울대 가렴"
하셨었는데, 못난 아들이라 죄송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왔으니 뭐 어떠랴...
내가 방문한 강의실은 'IBK커뮤니케이션센터'라는 곳이었다. 입구에서 제법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유일한 편안함이었다...) 미리 도착해서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는 그 호칭, 조교님께 강의실을 안내받은 후 가볍게 짐을 내려놓은 뒤 학생들이 없어 보이는 빈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몇 번이고 수정하고 바꿨던 프레젠테이션이었지만 혹시나 발표 중에 절거나 멈출까 봐 남은 시간 동안 소리 없이 리허설을 하고 있었는데, 이건 또 뭔... 갑자기 대표님이 몇몇 내용을 좀 더 쉽게 바꿔달라고 요청을 주셔서 부랴부랴 수정을 했던 기억이 난다. PT 하는 것도 아닌데 뭔 발표 10분 전 수정인지... 수정을 마치고 들어간 강의실은 내가 배우던 곳과 분명 다른 공간이었지만 그럼에도 같은 같은 공간처럼 다시금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자리를 찾는 나른한 발소리, 묵직하게 내려놓은 분주한 가방 소리와 함께 이따금씩 아는 사람이 있는지 조용히 건네는 인사와 내려앉은 공기의 텁텁함과 시원함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강의용 데스크는 굉장히 뭐랄까 본적 없는 최신의 기술과 00년대에 생각한 미래기술이 탑재된 그런 데스크였는데 발표에 필요한 모든 기능과 터치스크린이 제공되면서도 아날로그 선 연결 방식과 사용자 비친화적인 UI 등의 조합이 흥미로웠다. 수업 내용을 내가 정리하고 만든 것은 맞지만 워낙 장표로만 얘기하기엔 내용이 방대해 발표자 메모를 봤어야 했는데 이것저것 설정을 해봐도 발표자 스크린이 보드에 뜨지 않아 그냥 늘 하던 대로 세팅을 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처음에 HDMI 선이 없어서 다시 조교실을 방문해서 대여하는데 옛날 느낌 나고 들뜨는 느낌이었다. 전에는 빌리러 가면 뭔가 안 들고 다니냐는 핀잔 소리를 들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퇴장했었는데 이제 떳떳하게 그냥 빌려가다니... 나 혹시 어른이 된 걸까?
세팅을 다 해두고 침착하게 앉아서 기다리는데 남은 시간이 모래 한 알 한 알 떨어지듯 느리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대표님이자 교수님은 지각하셔서 이 어색한 무거운 공기 속에 10분이나 더 갇혀있었던 게 생생하다. 학생들의 출석이 끝나고 대표님의 안내가 끝난 후 특강의 시작. 발표의 첫 멘트는 뭔가 훅 하면서도 임팩트 있게 주제를 알리면서 사소한 유머가 있었으면 해서 아저씨마냥 쳐봤는데.
AI를 학습하는 것은 단순히 미래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과정이다
"누가 한 말인지 아시나요?, 스읍... 제가 오는 길에 적어본 말입니다. 리를 죠크^^;"
다행히 관심 없어 보이던 학생들의 눈에는 흥미가 돋아있었고 새삼 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격한 부담감과 함께 이 발표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기 시작했다. 준비한 자료는 AI를 실생활과 과제. 또는 프로젝트에서 유용하게 쓰는 법을 보여줄 수 있게끔 직접 AI를 활용한 인사이트 도출과 아이디어 도출 과정을 담아왔는데 처음 사내에서 발표할 땐 그냥 진행했던 것들을 서울대생들이지만 그냥 어린 친구들이라 생각하고 굉장히 쉽게 새로 디벨롭했는데 오히려 더 이해하기 쉬운 자료가 된 것 같았고 설명을 하는데 다들 어려워하지 않고 잘 따라오는 것 같아서 나도 신이 절로 났다. 가장 기본이 되고 있는 대형언어모델을 그냥 챗봇이 아닌 자신만의 세팅을 만들거나 질문의 공식을 만들어 '역할놀이'하는 식으로 풀어봤는데 다들 표정이 뭔가 어안이 벙벙한... (o 0o) 넋이 나간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어서 뭔가 문제가 있나 싶었다. 친구들에게 맞게 대형언어모델의 현실의 사용법과 응용법에 대해 설명했는데 특히 '질문하기'에 대해 중요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따져보면 AI의 뇌 자체는 이미 엄청나게 뛰어나다, 다만 아직은 좋은 뇌를 가진 어린아이 같은 친구이고 그만큼 질문을 할 때 자세하게 해 줘야 대답도 잘한다는 것을 알려줬는데 예를 들어 '세탁세제에 대해 알려줘'라고 하는 것보다 '나는 현직 마케터인데 최근 세탁세제의 동향과 추세, 성분에 대한 가십거리 등 다양한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리서치한 후 요약해서 알려줘'라고 하는 것과 다른 것을 알려주었다.
처음 보는 친구에게 다짜고짜 질문하는 게 아닌 자세히 얘기를 나눠야 대화가 되듯이 천천히 차분히 대화를 나눠보라는 내용인 것이다. 이를 활용하여 직접 리서치를 혼자 반복적으로 해나가는 것보다 AI를 활용해 많은 내용과 자료를 빠르게 서치하고 정리하여 자신이 시간을 써야 할 창의성 영역에 투자를 하여 시간적 로스를 줄이는 방법으로 떨어지게 알려주었는데 학생들이 구내식당 5번 갈 돈을 매달 내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무료로 응용하는 방법으로도 공유를 해주었다. 그래서 며칠 정도를 시간을 태워야 할 것을 단 몇 시간 만에 인사이트 정리, 그것을 토대로 메인 키 카피와 바디 카피까지 풀어내는 과정을 보여주고 직접 해보는 실습 시간을 가져 본 후 AI를 활용한 생성형 이미지 완성도에 대한 가벼운 설명과 광고 사례, 그리고 실생활에서 뉴스레터 받듯이 보는 법들을 설명하며 마무리하였다. 3시간이면 굉장히 긴 시간일 줄 알고 이거 다 못 채우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오히려 내가 말이 너무 많아져서 시간을 다 쓰게 돼서 좀 미안하기도 했던 것 같고... 한편으론 너무 긴장해서 시간 흐르는 게 느껴져 버리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눈 떠 보니 마무리 멘트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수업이 끝나고 나니 뭔가 달려왔던 4개월 정도의 고통을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몰려왔다. 물론 수업을 위해 준비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자료를 위해 만드는 과정이라던가 공부해 오던 시간들의 끝에 엔딩크레딧이 올라오며 불이 켜지는 듯한 광명을 마주했다. 참 이게 뭐라고... 내 일도 아녔던 걸로 어쩌다 여기까지 온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절로 지어진 미소에 새어나갔다. 제일 웃긴 점은 내가 뭐라고 서울대생들에게 강의까지 한 건지 진짜 글을 쓰는 4개월 뒤인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평범한 대행사 피디였던 내가 AI픽업 아티스트?!) 수업 퀄리티나 진행이 엉망진창이라 다들 황급히 나갈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끝나고 이런 발상을 한 게 신기하다던 학생도 있었고 다른 분야에 응용해보고 싶거나 과제에 더 활용해보고 싶어 팁을 물어보는 친구들이 많아서 깜짝 놀랬다. 얘들아 미안 ㅠㅡㅠ...
그래도 내가 겪어보지 못할 경험이었던 걸 해본 것 같아 좋았다.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