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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옥 Oct 21. 2023

연말정산

한해를 보내기 전 싸움 한판

한해를 보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새해를 맞는 것보다 마지막을 보내는 것이 더 어렵다. 엄마의 잔소리 때문에 더 그렇겠지. 한해의 마지막을 그냥 보낼 수 없다. 뭔가 이벤트를 만들어야 하고 의미를 부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엄마의 못된(?)버릇은 12월 31일에 그 마지막을 장식한다. 연말정산을 해야만 새해를 맞을 수 있다.

올해는 12월 31일이 마치 계산이라도 해놓은 듯 토요일이다. 토요일 저녁 우리집 풍경은 모두모여라 이다. 저녁을 먹고 난후 8시가 되면 아니 7시 50분이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거실 책상에 모두 모여야 한다. 가족회의도 해야 하고 가정예배도 드려야 한다. 그리고 얼마전부터 시작한 속담 맞추기 시간도 있다. 엄마는 이 모든 일들이 정말정말 재미있는데 과연 아이들도 그럴까? 아니어도 된다. 아이들은 그저 엄마 아빠와 함께 할수 있다면 좋다는 표정이니 말이다(이건 순전 내 생각임).

저녁에 되자 핑계없이 다 모였다. 우리집에서 핑계란 도전과도 같은 것이다. 아마 핑계라는 낱말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거의 독재에 가까운 우리집 풍경이지만 엄마는 그 안에 사랑을 심는다고 믿는다. 자신을 되돌아 볼수 있는 시간이 되고 타인의 생활을 들여다 볼수 있는 기회가 된다. 각자가 보낸 한해의 시간을 말해주고 들어주면서 공감과 반성, 새로운 힘을 얻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름 준비하고 계획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대략 한시간이 조금 넘었을까 싶다. 아이들도 조금씩 힘들어 하는 눈치가 있어 서둘러 끝내려고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우리 집 큰 아들(아빠다)은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진 탓일까, 몸을 비틀고 인상이 찌그러 진다. 마지막 순서인 자신에게 편지를 써보는 시간까지 참다 참다 못 참았는지 대충 써대고는 짜증을 낸다. 애써 준비한 시간의 마지막에 엄마는 기분이 확 상하고 말았다. 그래도 아이들 있는데서 같이 성질 낼 수 없어 꾹 참고 마무리를 지었다.

방에 들어와서 생각해 보니 너무 억울하고 슬프기까지 했다. 화가 잔뜩 난 엄마는 침대 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심통을 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남편은 

“왜? 왜 그래?”

“됐어, 나 앞으로는 가족모임이고 뭐고 안할 거니까 당신이 알아서 다 해쳐먹어.”

“아니, 왜 그래? 갑자기.”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려는 심보. 누가 모를줄 알고. 나의 무기인 큰소리를 불러냈다. 

“그러니까, 연말에, 그것도 마지막 시간에. 한 시간을 못 참고 성질이냐? 얘들도 다 참고 하는데 아빠가 되가지고 그렇게 짜증을 내면 내가 뭐가 되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했을까 조심스럽게 항복을 청하는 남편이 정말 밉다. 말이 나온김에 연말정산을 제대로 한번 해보자 싶어 그동안 있었던 너의 횡포에 대해 까발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말야, 가정예배 드릴 때 어쩌는지 알기나 해! 한번 잔소리 시작되면 한도 끝도 없어요. 당신은 그게 말씀이니 뭐니 하는데 내가 듣기엔 잔소리야 잔소리. 알아!”

“나는 그 잔소리에 한번 대꾸 안하고 다 듣고 있어. 뭐 그게 어마어마한 진주보석같은 말씀이라 듣는 줄 아나봐. 그냥 들어주는 거라고 그냥.”

“그런데 연말에 딱 한번 내가 좀 길게 시간을 썼다고 이렇게 사람을 무안 주고 그러냐?”

여기까지 나오자 우리 집 진짜 찐 큰아들, 엄마에게 언제나 우군인 너무나 듬직한 아들. 아들이 나섰다.

“엄마, 그만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저도 조금 길어서 짜증이 났어요. 짜증내서 미안해요. 엄마. 그만 하게요. 연말인데.”

“휴!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참고 넘어간다.”

무사히 정산을 마치고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 

어떤 때는 아이들 틈에 끼어 살다 자신을 잃어버릴 때도 있는 게 사실이다. 잘 키우기 위함이라고 포장하고 조금은 과하게 밀어부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조연으로 등장하는 우리집 내사랑 남편은 이렇게 아내를 지킨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너무 깊이 파지 말라고. 그리고 지나치게 감정에 함몰되지 말라고.

엄마는 서툴게 정리하고 다시 제 자리를 찾아 편안한 마음으로 한해의 정산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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