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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의사 송태호 Dec 10. 2019

그 땐 그랬지.

(왕진의 추억)

몇 년 전 가을 독감(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이 한창이던 시절 우리 병원에 다니던 환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모시고 사는 어머님(시어머님)에게 독감 접종을 해 드려야 하는데 어머님이 거동이 불편하셔서 혹시 오셔서 접종해 주실 수 는 없나요?’ 아픈 환자 때문에 왕진을 부탁 받은 적은 있어도 접종을 위한 왕진을 부탁 받은 적은 처음이었지만 동네의사로서 당연히 해드릴 수 있는 일이기에 저녁 진료를 마치고 혼자 아이스박스에 주사를 넣어 동네에 있는 환자의 집으로 걸어갔다. 가던 도중 알콜솜을 챙기지 않은 것이 생각났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갔더라면 굉장히 난처한 일을 겪을 뻔 했다. 다시 병원으로 발걸음을 돌려 알콜솜을 챙기고 부랴부랴 환자의 집으로 가는데, 항상 병원 안에서만 보던 나를 아파트 단지내에서 보게된 나의 환자들은 무슨 일이냐며 인사를 해왔고 나는 그냥 주사 놔드리러 간다고 눙치고 갑자기 생긴 왕진을 무사히 해결하고 엘레베이터를 탔다. 꽤 고층이었기에 내려오는데 시간이 걸렸고 먼저 엘레베이터에 타고 있던 엄마와 애가 소곤거리며 하는 말이 들려왔다.

 ‘ 엄마 저 사람 의사선생님인데 여기 사나? ‘

 ‘ 아닐껄?! 아픈 사람이 있어서 왕진 오신건가봐.’

 ’ 아픈 사람이 병원에 안가고 의사선생님이 오는거야?’

 ’ 너무 아파 움직이지 못하면 그러는 거야.’

 ’ 나도 너무 아프면 의사선생님한데 오라구 하자. 헤헤’


허름한 단칸방에 환자가 누워 있고 의사는 왕진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내어 환자를 진찰하고 가족들은 둘러앉아 무슨 결과가 나오나 초조하게 기다린다. 이윽고 진찰이 끝나고 마당으로 나온 의사는 가족들에게 침통한 표정으로 ‘더 이상 해드릴것이 없습니다. 편안하게 드시고 싶은 것이나 드시도록 하시고, 통증이 심하면 제가 드린 약 드시도록 하세요’ 란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서고 가족들은 소리를 죽여 울먹인다. 이 때 주인공은 두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환자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에게 복수를 맹세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는 시대극이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장면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여도 우리 동네 의사 선생님이 왕진을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의사가 들고 다니는 왕진 가방 안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해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되고 왕진 비용을 따로 청구 할 수 없게 되자 왕진이 점차로 줄어들었다. 사실 집 앞 구석구석까지 차들이 다니기 시작하고 집집마다 개인 자가용이 늘어나면서부터 점점 왕진이란 개념이 없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내가 의사가 된 후로 처음으로 했던 왕진은 이제는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였다. 간이 안 좋으신 할머니가 갑자기 숨이 차다고 하셔서 몇몇 주사약을 준비하여 서둘러 집으로 가던 기억이 난다. 전문의가 되고 군대에 가서 야전군의관이었던 시절은 순회진료라는 이름의 왕진을 신물나게 했다. 트럭을 개조한 앰블런스에 위생병과 함께 타고 털털거리며 몇 군데 왕진을 돌고 나면 나도 모르게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처음 부대에 갔을 때 제대로 된 왕진 가방 조차 없어 자동차 공구함을 구입하여 그 것을 왕진 가방으로 사용하였다. 칸이 잘 나뉘어진 자동차 공구함은 여러 약품과 청진기,붕대,실,바늘 등의 기구를 깔끔하게 보관할 수 있는 좋은 왕진가방 대용이었다.


개원 후에도 가끔 왕진 의뢰를 받는데 대개의 경우는 너무 연로하셔서 기력이 없는 경우이거나 병이 너무 깊어져 이미 말기여서 통증 조절을 위한 경우이지만 왕진을 거절한 적은 없다. 하지만 왕진에 있어서 몇몇 법적 제한이 있다. 일단 왕진은 장기 요양보험 대상자를 왕진 할때만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고 그 나머지 경우에는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일반으로 진료를 해야 하고 이는 왕진 후 처방 받은 약을 살 때도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일반가로 사야한다. 설령 환자가 적법한 대상이 되어 의료보험으로 왕진을 하는 경우라도 49300원의 저수가로 책정되어 있어 많은 의사들이 기피하는 실정이다. 가전제품 A/S때의 출장비(수리비가 아니다. 단지 왔다 가는데 지불하는 금액이다.)도 이미 몇만원하는 시대에 사는 나는 그래도 가전제품 출장비보다는 비싼 왕진비를 고마워 해야 하는걸까?  


어떤 의사는 순수하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호스피스 시설에 왕진을 가서 진료한 내역을 의료보험에 청구 하였다가 보건복지부로부터  ‘속임수 그밖의 부당한 방법으로 공단에게 급여비용을 부담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며 1년간의 자격정지를 선고받고 수년간의 소송 끝에 누명을 벗은 일도 있다. 몇몇 의료생협이라는 곳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회원들에게만 왕진을 제공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제는 왕진절차에 대한 정부차원의 손질이 필요하다. 최근에 왕진에 대한 정부의 방침이 나오긴 했으나 아직도 정비하고 보완해야 할 법률적인 측면이 많이 있어 보인다. 어쨌든 나는 나를 필요로 하며 내가 도움이 되는 한 왕진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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