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혜윰의 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윰쓰다 Dec 13. 2019

끊길 듯 끊기지 않는 책과 나의 관계성.

도서관을 방공호 삼고 책을 약으로 삼았던 나날.

 지난한 사춘기 시절이 있었다. 내 방 한 칸 없었던 그때의 나는 퍽 아팠다. 고민하고 사색해야 할 그 시절에 나의 공간은 없었다. 우리 집이 부끄러워서 친구들에게 비밀로 하기 위해 골목을 빙 돌아 집에 간 일도 있었고, 사춘기 시절 반항하다가 크게 혼나도 내 방 하나 없어 엄마와 등을 맞대고 자야 했으며, 친구들을 데려오고 싶어서 그 추운 겨울에 엄마와 함께 핑크색 벽지를 열심히 발랐고, 동생까지 내쫓아가며 좁은 집에 데려왔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들어온 순간 지었던 그 굳은 표정을 의식해야 했다. 그중 한 친구가 엄마와 영상 통화하면서 내 화장대를 비추었고 "이게 화장대래"하며 비웃을 때 애써 못 들은 척했으며, 친구들 중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우리 집 화장실을 보며 "너네 집 화장실이 이래서 네가 화장실 셀카를 안 찍었구나"라는 무해한 의도의 무심한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대처해야 했다. 그날 밤, 넉넉지 않은 형편에 엄마가 시켜줬던 피자를 우걱우걱 씹으며 "이런 피자집도 있어?" 하는 친구의 비웃음에도 어버버 하다가 결국 대답하지 못했고, 밤새 놀고 싶었던 나와 우리 집에서 빨리 달아나고 싶었던 친구들의 다른 마음 때문에 하는 수없이 일찍 잠들어야 했다. '친구들을 괜히 데려왔나' 하는 서글픈 마음으로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다가 문득 눈을 떴을 때, 동생이 언니 친구 온다며 천장에 열심히 붙였던 야광 별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친구들이 우리 집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곱등이를 못 보았다는 데 위안을 얻어야 했던 그 밤. 어린 마음에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서글퍼서 홀로 밤을 지새웠다.


 그날 이후로, 미친 듯이 공부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거창한 꿈은 없었다. 내가 좋은 대학교를 나와서 돈을 많이 벌면, 아니 다른 지역의 대학교를 가면 적어도 내 방은 생기겠지,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공부였다.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공부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왈칵 밀려든 우울감이 나를 잠식했다. 정말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당장 충족되지 않은 내 공간에 관한 욕구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도 학교를 마치면 생지옥 같던 우리 집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중학생 시절 외로울 때마다 학교 도서관을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 활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책들이 책장에 단정하게 진열되어있었지. 그래서 건조한 냄새가 났지. 매일 습해서 주기적으로 보일러를 틀어야 했던 우리 집과 많이 달랐지. 내가 다니던 중학교의 학생들은 책을 읽지 않아서, 나 홀로 된 그 공간이 마치 전부 내 방 같았지. 아무런 제약 없이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좋았지. 책 속에서 나와 비슷한 인물을 만나면 한바탕 울었지. 그냥 그것만으로도 참 좋았지. 내 방과 내 책으로 쉽게 치환할 수 있는 그 공간과 책이 정말 좋았지.' 그 시절을 떠올리며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 가보았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단 한 번도 간 적 없었던 도서관에서 또다시 위안을 얻었다. 책을 자주 빌려다 보고, 가끔 힘들 때면 도서관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서 선생님께서 3학년이 이 도서관에 오는 건 처음이라며, 누구보다 따뜻하게 맞이해주셨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공간이 내 고단한 대학 입시 생활의 방공호였던 것 같다. 그 꿀 같은 날들은 어느 날 내 도서대출 기록을 보신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교무실로 불러 '책은 대학 가서 보고, 지금은 공부해!'라는 사자후를 터뜨림과 동시에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시간이 흘러 대학교에 들어갔고 여전히 책 읽을 시간은 없었다. 학과 특성상 학과 공부에 파묻혀 살아야 했고 국가고시도 치러야 했기 때문에 나와 책의 만남은 쉽사리 성사되지 않았다. 운이 좋게 대학생이 되자마자 내 방이 생긴 덕분에, 나만의 공간을 대신했던 도서관도 쓸모 없어졌다. 삶이란 게 이토록 전형적일 수 있을까. 대학생활에 지쳐서 또다시 힘들었다. 이번엔 내 공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나만을 위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독서를 하면서 또 다른 질감의 위로를 얻었다. 미디어를 통해 얻은 위로가 1차원적인 위로였다면, 독서를 할 얻는 위로는 3차원의 가시화된 위로였다.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손에 잡히는 온기가 좋았고, 종이책의 냄새가 좋았고, 그 속에 어떻게든 묻어있는 내가 좋았다. 시험기간이 끝나면 한아름 짊어지고 온 책에 파묻혀서, 그렇게 나 자신을 위안했다. 책과의 꿈같은 재회였다. 누군들 책과 각별한 사이가 아니겠냐마는, 나는 특히 책이 온통 고맙고 사랑스럽다. 우울과 행복이 동일선상에 있다면, 나는 책 덕분에 제법 행복 쪽으로 향하고 있다.







북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fromhyeyum/

북블로그: https://blog.naver.com/hyeyumchu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