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지 못한 문턱
“I have a dream.”
1963년 마틴 루터 킹은 그의 꿈을 말했다. 인종의 다름으로 차별이 발생하지 않기를, 그래서 그와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땅 위에서 모두가 공존하며 살아가기를 말이다. 하지만 그가 희망에 관해 던진 메시지에는 동시에 마땅히 가져야 함에도 가질 수 없었던 절망이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꿈과 소망을 말하는 건 역설적이게도 현재 나의 결핍을 마주하는 일이 되는 것 같다.
2022년 여름은 나의 소망이 실현되던 때였다. 그해 여름 나는 영국으로 향했다. 유럽 여행이라면 보통 몇 개국을 다니지만, 나는 2주간 영국에서만 지냈다. 이동 경비를 아낄 요량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좋아했던 모든 문화들이 영국에 뿌리를 둔 터라 영국에만 온 집중을 다 해보고 싶었다. 설렘이 한가득이었다. 어찌나 신났는지 밥 때도 잊고 런던 곳곳을 걸어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4일 차가 되는 날이었다. 더는 견디지 못한 발바닥이 아우성을 쳤다. 신발을 벗어 확인해 보니 발바닥에는 무려 4개의 물집이 잡혀 있었다. 도저히 걷기가 힘들어 한번 씩만 타던 버스를 더 자주 타기 시작했다. 이동 내내 창 너머만 구경하던 내게 어느 순간부터 자꾸 눈에 밟히는 대상이 나타났다. 바로 장애인이었다. ‘이렇게 장애인이 많다고...?’ 솔직히 조금은 놀랐다. 런던 거리 곳곳에 장애인이 있었다. 대중교통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버스를 타더라도 장애인이 있었고 어떤 동네든 꼭 한 명씩 장애인을 마주했다. 런던만이 아니었다. 브라이튼, 콘월, 리버풀, 레이크디스트릭트. 내가 방문한 모든 도시에서 장애인을 마주했다. 그해 내가 한국 길거리에서 본 모든 장애인보다 영국에 있던 2주간 더 많은 장애인을 보는 것 같았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의 <2020 장애통계연보>에선 한국의 장애출현율이 5.4%, 영국은 27.3%다. OECD 평균은 24.5%로 보고 됐다. 이 자료만 보면 한국의 장애인 수가 현저히 적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실 장애는 국가 복지의 핵심 중 하나이다. 다시 말해 국가가 장애를 어떻게 규정할지에 따라 출현율은 달라진다. 즉 한국의 장애 규정과 영국의 장애 규정에는 본질적인 정도의 차이라는 게 존재한다.
이러한 수치를 정량적으로 비교하는 건 맥락을 다 보지 못하는 거라고 느꼈다. 나는 한국과 영국을 경험적으로 비교해 봤다. 무엇보다 장애를 대하는 태도에 관해 주목했다. 내가 영국에서 가장 놀란 부분은 어디서든 장애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기차와 버스를 탈 때 휠체어를 위한 오르막 경사가 늘 준비돼 있었다. 한국이었으면 장애인을 잘 볼 수 없을 법한 공간에서도 장애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 미술관, 마켓, 해변, 가장 충격은 비틀즈의 첫 공연장 ‘더 캐번 펍’에서도 장애인과 함께였다. 2주라는 짧은 시간의 경험을 비교하는 게 우스울 순 있다. 하지만 그 2주 동안 마주한 장애인의 수와 그들을 향한 사회의 태도는 인식을 변화시킬만했다.
지난해 한국의 지하철은 전장연의 시위로 떠들썩했다. 그런 취재 방법을 개인적으로는 싫어하지만, 기자와 정치인들이 장애인들을 이해하겠다며 휠체어를 탄 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만큼 사회적 이슈였다. 소란 속에서 나는 사실 제3자였다. 바글바글한 서울에서 시간에 쫓겨 살아보지 않았기에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짜증과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시위의 방법이 마냥 온당하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나의 권리는 타인의 권리의 끝에서 시작한다. 그런 관점에서 전장연의 시위는 수많은 일상을 발목 잡은 셈이었다.
하지만 구석에서 조용히 찌그러져 시위하는 게 과연 정말 시위일까? 그런 시위가 당사자들의 불만을 진정 담고 있을까? 이 시끄럽고 불편한 시위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건 뭘까?
지난 몇십 년간 한국 사회는 장애인을 마주하는 태도를 배우지 못했다. 우리에게 늘 장애인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였고 안쓰러움의 대상이었으며 적당히 세금에서 보조금이 지원되는 대상이었다. 장애 아동들이 학교에서 놀림받을 때도, 장애인 학교를 혐오시설로 여기는 타 학부모들 앞에서 장애 아동의 학부모들이 무릎 꿇었을 때도 우리는 철저히 뉴스거리 정도로 치부하며 바라보았다. 시민들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한 번도 진지하게 장애인들의 삶을 논의해 본 적 없는 여의도였다. 장애인들은 이 땅 위에서 장애라는 다름으로 차별받고 싶지 않다며 외쳤다. 그들은 좀 더 자유롭고 싶은 바람을 담아 그들을 위한 논의가, 법안이 국회의 문턱을 넘길 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는 동안 장애인들의 삶은 바뀐 게 없었고 국회와 시민 사회가 방치하는 동안 장애인들은 평범한 식당의 문턱조차 넘을 수 없었다.
알량한 시민 의식이나 정치적 올바름 따위를 선전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런 게 있지도 않다. 앞서도 말했지만 전장연의 모든 시위 방식이 옳다고도 여기지 않는다. 다만 나를 둘러싼 우리 시민 사회가 잊지 않았으면 한다. 장애인들이 외치는 꿈과 소망이 오랜 시간 그들의 결핍으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공동체로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마땅히 가져야 함에도 가지지 못한 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