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1일
인생에는 중대한 사건 없이도 유독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절들이 있다. 내가 스물세 살적 얘기를 해보고싶다. 그때는 여러 가지 사적인 일로 어두운 구름이 낀 시기였다. 휴학을 하고 자의적으로 모든 친구들과의 교류도 끊고 외롭고 혼란스러운, 뭐 다들 그런 때 있지 않나. 무튼 나는 그때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시절 난 제대로 된 수면과 섭식도 어려운 나쁜 상태였는데 평일 아침부터 오후 세시까지의 영화관 근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드물게도 그곳은 아주 유서 깊은, 건물 한동이 전부 영화관인 말하자면 영화를 사랑하는 나에게는 유원지 같은 공간이었다. 우리나라에 멀티플렉스가 생긴 뒤로는 천천히 낡아가고 추억 속으로 잠기고 있긴 했지만. 난 그곳에서 1년 가까이 일했고 참 다양한 업무를 맡았었다. 개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추억 몇 군데를 말해보고 싶다.
하나는 아무도 없는 꼭대기 층에서 몇 시간 동안 팝콘을 만드는 일이다. 기계에 기름과 옥수수를 붓고 기다렸다가 봉투에 팝콘들을 담는 업무였다. 사람들이 거의 극장을 찾지 않는 나른한 낮에 그 일을 시키는데, 팝콘 기계 소리도 너무 평화롭고 갓 익혀진 팝콘 몇 알을 집어먹는 쏠쏠함도 있었다. 단점이라 하면 일을 마치면 옷 전체에 팝콘 기름의 고소한 누린내가 밴다는 것 정도. 또 시와 아트하우스 영화를 좋아하는 동료와 대화하는 일, 그 친구와 교대로 옥수수 포대자루 위에서 낮잠을 자는 일이라던지. 접근 금지의 아름다운 옥상정원을 몰래 산책하는 일도 행복했었다.
영화가 끝나기 5분 전쯤 들어가서 점등을 기다리는 일도 했었는데, 마지막 장면에는 보통 스코어가 좋은 경우가 많다. 큰 사운드로 좋은 음악을 듣는 즐거움도 있고 점등을 하고 많은 관객들을 이동시킬 때 느껴지는 변태스러운 권력감도 찌릿 했었다. 또 사람들이 다 나가고 나면 영화도 꺼지고 대형 스크린 앞에 나 혼자 남게 된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가 영화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현실세계에 불시착한 영화 캐릭터가 된 이상한 상상을 즐기곤 했다. 다분히 망상적이고 낭만이 뒤섞인 그런. <카이로의 붉은 장미> 같은 영화를 좋아해서였을까. 특히 12관이었나 제일 큰 관에서가 가장 달콤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출근해서 일을 시작할 때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곳은 10층이 넘는 건물 전체가 극장이었다. 출근을 하면 휴대폰으로 우선 피곤한 아침에 들어도 부대끼지 않을 만한 음악으로 골라 틀어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일 중이라 이어폰을 끼면 안 되니까 나만 들리게 슬쩍 스피커 모드로. <러브레터>의 사운드트랙이나 <스플래쉬>의 ‘love came for me’를 가장 많이 들은 것 같다. 업무는 간단했다. 승강기로 가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서 등을 켜고 그 뒤로는 계단으로 내려와서 한층 한층 등을 키는 일이었다. 지난 밤동안 어두웠던 높은 건물 하나가 내 손으로 밝아지는 기분이란. 마치 자고 있는 영화들을 하나하나 깨우는 것 같았다. 단정하고 산뜻했다. 먹고 자는 것도 버거웠던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스물세 살의 내게 유능감을 주는, 아주 귀하고 뿌듯한 일이었다. 파리한 내가 경쾌하게 등을 켜고 다니는 모습. 난 그 일을 가장 사랑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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