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고백을 위한 언어 (글을 쓸 때 비로소)
'노력이'와의 화해는, 내면여행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밤에 찾아왔어요.
'노력이'는 늘 120%의 힘으로 달리고 있었거든요. 엔진 소리가 요란해도, 그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힘 빼는 법을 몰랐어요. 100%의 힘으로는 어쩐지 '방전'될 것만 같아 '불안이'가 자꾸 속삭였죠.
그렇게 평생을 달려오던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은 이직한 지 6개월 차, 업무 평가 회의 날이었죠. 아동발달센터의 '매출'로 잡히는, 정부 지원 치료비(바우처) 실적을 정산하는 날이었어요. 대상자 한 명 당, 한 달 평균 8회기에 22만 원. 그 숫자가 저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잣대처럼 느껴졌어요. 원장님은 제게 배정된 바우처 금액 사용 내역을 훑어보시더니, 한숨을 쉬며 차가운 눈빛으로 저를 봤어요.
"은빈 쌤, 솔직히 말할게요. 나 지금 바우처 금액도 선생님한테 주기 아까워요. 10년 차 언어재활사가 이런 결과밖에 못 내면 어떻게 해요? 조금 더 역량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요?“
마치 ‘너는 이것밖에 못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죠.
10년이라는 시간을 바쳐 쌓아온 제 전문성이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어요. 제 손을 거쳐 간 수많은 내담자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어요.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돈을 받고 있었나?'
‘직장인 10년 차면 이 정도 모았지?’
‘전문가 10년 차면 이 정도 케이스는 껌이지?’
사회적 기대에 닿지 못한 저는 스스로 '물경력'이라고 깎아내렸어요. 흐르지 못하고 고여있는, 썩어가는 물 같았죠. 저를 난도질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저조차 기꺼이 먹잇감이 되어주는 꼴이었어요.
저는 그 길로 회의실을 뛰쳐나와 동네병원을 거쳐 대학병원으로 향했지만, 병실 안에서도 자기 비난은 멈추지 않았어요.
배정받은 1인 병실로 정신간호사들이 안부를 살피러 왔어요. 저는 “병신 같은 생각을 했다”라고 고백했죠.
저녁은 먹을 수 있겠냐는 질문에 돌아온 것은 흰 죽 한 그릇. 미지근한 죽이었어요. 뜨끈하면 사고가 생길까 봐, 아니면 이 온도가 저에게 주어진 안전의 한계일까. 그 죽 한 그릇에도 위험과 안전이 동시에 담겨 있었죠. 그렇게 만 하루를 지냈어요.
고작 하루였지만, 제 아픔을 스스로 감당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전공의 선생님이 찾아왔어요.
“은빈 씨, 괜찮아요? 컨디션 안 좋았던 건 기억해요?”
“선생님, 환자복 입은 제가 너무 혐오스러워요.”
잠시의 정적 뒤, ‘맞아, 나 여기 낫고 싶어서 왔지.’라는 생각이 스쳤어요. 잠깐이지만 완벽한 환자의 마음이 제 안에 들어왔죠. 습기로 가득한 눈이 되었어요.
울고 나니 배가 고팠어요. 숱하게 눈물을 참아왔던 저와는 다른 모습이었죠. 그 순간은 낯설었어요.
그동안 저는 눈물을 참아왔으니까요. 그때그때 울어주었더라면 환자복을 입을 날은 없었을까요. 그렇게 또다시 자책을 떠올렸지만, 이번엔 달랐어요.
메말랐던 정신이 흘러내려서였을까, 아니면 물리적으로 눈물을 흘린 탓에 육체가 허기져서였을까. 배가 고팠어요. 눈물은 저를 흐르게 했어요. 면담이 끝날 즈음 전공의는 말했어요.
“병식[3]이 좋은 편이세요.”
[3]자신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정도를 뜻하는 의학 용어입니다.
책 속에서만 보던 단어가 제게 붙여지니 현실감각이 낯설어졌죠. 그 말이 칭찬인지, 진료의 방향을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었어요.
다만 제가 상담했던 아이들이 떠올랐죠. 지적장애, 자폐, 뇌 병변, 단순한 언어발달지연을 가진 아이들. 그 아이들이 저보다 먼저 정신과 상담을 받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저는 몸을 챙기러 온 순간에도 타인의 아픔을 돌보는 데 익숙했으면서 정작 제 아픔은 외면했다는 사실이 서늘하게 다가왔어요.
'일로 쓰이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는 생각', 그 과대한 믿음 속에 제가 있었죠.
그 불안의 뿌리. 저의 '반려 불안'이었어요. 그렇게 저를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첫 상담을 마쳤답니다.
48시간 뒤, 드디어 따뜻한 밥을 먹었어요. ‘집밥 같은 병원 밥’이 뜻밖에 맛있었죠. 이어 약이 도착했어요. 선택은 없었어요. 나가고 싶다면 먹어야 했죠.
그래, 이틀 정도는 아플 수 있지.
스스로를 달래며 숟가락을 들었어요. 병원 밥이 집밥처럼 맛있어서였을까, 아니면 약효가 돌았기 때문일까요. 예전에 코끼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어요. 거대한 몸집과 다르게 주사 한 방에 픽 쓰러지는 코끼리. 저도 그처럼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작은 약의 힘에 무너져 내면의 불안을 마주해야 했어요. 약에 취해 오랜 시간 불안으로 달궈졌던 머릿속이 미지근해지며,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죠.
저는 몰랐어요. 그 잠이 2160시간, 즉 90일의 고립으로 이어질 줄은. 저에게 다정한 제가 되기까지 필요한 최소 시간이 90일이었던 거예요.
병실 생활은 혼란 그 자체였어요. 정신없이 오가는 간호사들, 쉴 새 없이 울리는 호출 소리, 그리고 저를 깎아내리던 원장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죠. 마음을 기댈 곳 하나 없는 헐벗은 기분, 꼭 목욕탕 안에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드러낸 채 저는 앉아 있었어요.
그 90일 동안, 목요일 오전에만 허락된 음악감상시간이 있었어요. 병동의 각기 다른 사람들이 자신만의 취향이 담긴 노래를 선곡하고, 다 같이 자기 차례의 노래가 나오길 기다렸죠. 그 시간을 견디며 저는 상상했어요. 내 인생이 영화라면 어떤 엔딩크레딧의 음악이 들릴까. 90일의 고립을 마치는 저의 엔딩곡은 잔나비의 ‘용맹한 발걸음이여’로 정했답니다.
새로운 아침이 반짝이는데
오늘은 누가 먼저 일어났나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음-
성실한 사랑이었네
그 가사의 첫 소절처럼, A/S를 마친 나의 하루하루를 매일 성실하게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했어요.
그때, 복도에서 한 학부모가 조심스럽게 다가왔어요. 어쩌다 보니 제 상황을 알게 된 그분은 혹시라도 괜찮다면 입학을 앞둔 자녀의 언어발달 상담을 해줄 수 있냐고 물었죠.
저는 퉁퉁 부은 눈으로 앉아 있었고, 그는 저를 재촉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낯선 병원 복도에서 우리는 마주 앉았어요. 병원복 차림으로 쭈그려 앉아, 저는 내담자의 눈을 들여다보듯 그 아이의 입학 상담을 해주었어요. 제 전문성을 증명하려는 욕심도, 잘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었죠. 그저 언어재활사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순수한 조언을 건넸어요. 상담이 끝나고 그 학부모가 말했어요.
"선생님처럼 진심으로 아이를 봐주는 분께 우리 애를 맡기고 싶습니다.“
그 한마디에 그동안 저를 다그쳤던 모든 말들이 사르르 녹아내렸어요. 바우처 금액이 아깝다던 원장님의 목소리, 물경력이라 스스로를 비난했던 제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지는 듯했죠. 저의 가치는 원장의 평가나 경력의 연차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진심에 있었음을 깨달았어요.
저는 더 이상 고인 물속에 잠겨 있지 않아요. 여전히 바다는 폭풍을 만나고, 다시 멈춰 서는 순간도 오겠지만, 저는 알아요.
바다는 결국 다시 흐른다는 것을. 제 그림자는 끝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것을 끌어안으며 살아가요.
그 90일의 고립 동안, 저는 ‘노력이’에게 편지를 썼어요.
사소한 선택의 순간마저 함께 있어준 저의 가장 오랜 친구에게.
"노력아. 너는 늘 120%의 출력값이 고정이었지.
엔진 소리가 요란해도 그 방법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기에, 너는 힘 빼는 법을 몰랐어.
100%라는 수치에서는 '방전이 아닐까'하는 '불안이'가 작동되었으니까.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더니 보는 사람들도 '도대체 언제 쉬는 거야?'라는 순수한 질문을 했고, 그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내 몸은 고장이 안 날 수가 없었어.
미안해. 그렇게 너를 다그치기만 해서.
타인에게 초점된 너의 노력이 불완전한 관계 속에서 나를 다그치는 채찍이 되었던 그 시간들을 고백하며,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저는 깨달았어요. 그 모든 순간들이 결국 ‘프로노력이’가 되어 저를 빛나게 했다는 것을.
흩어져 있던 저의 모든 파편들이, 그저 무의미한 조각이 아니었음을.
글쓰기는 흩어진 별들을 잇는 선을 긋는 행위와 같았어요. 저의 모든 파편에게 편지를 쓰며, 저는 처음으로 그 조각들을 다정하게 이어보았죠. 그리고 그 끝에서 발견했어요. 빛나지 않은 순간은 없었다는 것을.
그 오랜 친구에게 저는 물었어요. 120%가 아니면 나를 떠나고 싶은지, 나라는 주인이 혹시 버거웠던 것은 아닌지.
사실은 주변에서 나를 다그치는게 아니라 내 안의 자기혐오가 나를 가장 다그치고 상처를 낸다는 사실을 90일의 고립에서 깨달았어요.
그 깨달음과 함께, 저는 ‘나에게 친절하기를 선택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