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 칭다오

by 누런콩

아버지는 주재원이었다. 처음 발령이 난 건 2006년이었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해외로 주재 발령이 나면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경우도 있다지만, 나의 아버지는 ‘가족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발령이 나고 채 세 달이 되지 않아 우리는 사는 곳을 옮겼다. 원래 살던 합정동 작은 집과 아직 이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나는 복잡한 마음을 뒤로한 채 칭다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국은 사막일 줄 알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막연히 떠오른 이미지랄까.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길가에서 전통복을 입은 상인들이 물건 파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 사막은 없었다. 바닷가를 끼고 달리긴 했지만, 여느 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크고 낮은 건물들이 즐비해 있었고 평범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길가에 있었다. 낯선 곳에 왔다는 실감이 나게 해 준 건 간판이었다. 커다랗게 새겨진 한자는 읽을 수 없었고 왜인지 모를 위압감을 주었다. 그 커다란 글자에 나는 기가 좀 눌렸다.


우리 가족이 살게 된 아파트의 이름은 ‘은도화원’이었다. 칭다오의 아파트 이름은 대개 ‘OO화원’ 아니면 ‘XX광장’이라는 식이었다. 은도화원 단지 내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있었고 야채 가게나 문구점도 있었다. 우리는 2동에 살았는데 3동을 넘어서는 갈 수 없었다. 엄마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은도화원이 몇 동까지였는지 모른다.

우리 집은 9층이었다. 1층 입구에는 철장이 쳐져 있었다. 철장 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또 문이 있어 ‘이런 데서 도둑 같은 건 없을 거야.’하고 생각했다. 청록색에 ‘복’ 자를 거꾸로 한 스티커가 붙여진 현관문을 열면 정면에 바다가 보였다. 거실은 널따랗고 오른쪽에 복도가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방 세 개가 옹기종기 모여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내 방이라고 했다. 내 방에서도 바다는 보였다. 이렇게 좋은 집은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이사 간 첫날밤에 밖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내 귀를 막으며 “여기는 공산국가라 총도 쏘나 봐.”라고 했다. 우리는 한참을 서로의 귀를 막아주며 주저앉아 있었다. 나중에서야 그 소리가 총소리가 아니라 폭죽 소리임을 알게 되었다. 불빛이 나지 않는 폭죽은 매일 밤 터졌다. 시내로 이사 갈 때까지 그 소리는 내 고막을 괴롭혔다.


중국에서 나는 한국인 학교에 다녔다. 우리 학교는 낡았지만 거대한 건물에 있었다. 운동장도 엄청나게 컸다. 셔틀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가면 외딴곳에 학교가 나왔다. 담임선생님은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학교에는 중국인 선생님도 많았고 국적을 알 수 없는 외국인 선생님들도 있었다. 나는 외국어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서 의식적으로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건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나를 중국 땅에 데려온 부모님에 대한 반항 같은 것이었다. 대신에 국어나 역사 같은 한국 교과목은 열심히 공부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전부 한국인이었다. 우리 학년은 채 스무 명이 되지 않았다. 처음 전학을 갔을 때는 서로 책상에 화이트나 네임펜으로 낙서를 해주는 게 유행이었다. 매일 책상에 어떤 낙서가 새로 생겼나 확인했다. 책상이 텅 비어있으면 내심 서운했다. 우리는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대부분이 “왜 나랑 더 친하게 지내지 않아?” 같은 유치한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감정 소모를 하다 보면 차라리 말이 통하지 않는 로컬 학교로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즈음 우리 가족은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가 다니던 성당은 독일이 칭다오를 점령하던 시절 지어진 성당이었다. 천장이 높고 오래된 건물이라 작은 소리도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성당에서는 ‘솔’ 톤으로 이야기하라고 했다. 억지로 쥐어 짜낸 높은 목소리로 다 같이 성경을 읽고 있노라면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우리 성당은 관광지이기도 해서 미사가 끝난 후 빨리 자리를 비워주어야 했다. 또 중국에서는 종교활동을 엄격히 제한하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는지 신부님은 피정 같은 행사가 끝난 후 나누어주었던 종이를 다 걷어갔다. 나는 그 옛날 박해받던 순교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중국은 조금씩 조금씩 서울과 달랐다. 길거리에는 동냥하는 사람이 많았고 아무렇지 않게 코를 휑 풀었고 아저씨들은 덥다며 웃통을 까고 배를 드러냈다. 길가에 파는 양꼬치는 쥐를 이용해 만든다는 소문이 있었다. 마작하는 사람들은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언젠가 중국 작가 위화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유년 시절의 향수를 느꼈다. 칭다오에는 겨우 2년을 살았을 뿐인데 말이다. 지금은 칭다오도 많이 변했다고 한다. 물가가 많이 오른 만큼 사람도 길거리도 세련돼졌다고. 코로나가 끝나면 언젠가 한 번 칭다오에 들를 참이다. 어쩐지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