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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런콩 Mar 02. 2023

상가리 야자 숲에서

사진 촬영은 이번 여행의 메인이벤트였다. 파리 여행 이후에 나는 기억할 만한 여행에선 꼭 스냅사진을 찍기로 다짐했다. 내가 제주에서 스냅사진을 찍겠다고 하니 회사 선배가 자신의 웨딩 스냅사진을 찍어주었던 작가를 추천해 주었다. 그 작가 사진이 마음에 쏙 들었지만 말도 안 되게 비쌀 것 같은 짐작으로 메모만 해두었다. 나는 이번에도 에어비앤비 앱에서 사진 촬영 체험을 찾아보았다. 제주는 인스타나 카톡 등 다른 SNS를 통해 접근하기가 쉬워 그런지 사진 촬영 체험이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았다. 스크롤을 한참 내리다 보니 삼만 오천 원이라는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으로 야경 스냅사진을 찍어준다는 게시물을 발견했다. 막상 예약하려고 보니 인당 삼만 오천 원이었지만 괜찮았다. 종일 놀다가 사진 찍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면 알차게 1박 2일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차가 없는 사람들은 11시 촬영으로 예약하라고 해서 그 시간에 예약했다. 촬영은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고 했다.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핸드폰 번호라 받았는데 사진작가였다. 시간을 조금 앞당겨 다른 팀과 같이 촬영해도 괜찮겠냐고 내게 물었다. 만나는 장소까지의 택시비는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안 그래도 촬영이 끝나면 너무 늦지 않을까 걱정하던 참이었다. ‘오히려 좋아.’ 나는 반가운 내색을 하지 않고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작가님은 숲의 밤은 추울 테니 보온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이미 담요 따위의 보온 물품을 챙기기엔 늦었다. 나는 그 말을 그냥 흘려들었다. 3월이 다 되어가는데 남쪽이 추워 봤자 얼마나 춥겠나 싶기도 했다.

 

한림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애월로 넘어갔다. 막내가 제주에 아주 유명한 카스텔라집이 있다며 꼭 들르고 싶다고 했다. 빵 쪼가리 먹으러 거기까지 가야 하나 싶었지만 10대의 감성을 해칠 순 없었다. 한정 판매라는 그 빵집에 미리 연락해 카스텔라 두 박스를 빼달라고 했다. 주변에 해수욕장이 있어 다행이었다. 굵은 설탕이 뿌려진 카스텔라는 달걀 맛이 강하게 났다. ‘내 취향은 아니네.’라고 생각했지만 “입에서 살살 녹네, 녹진한 맛이 환상적이야.”라며 세상에 둘도 없는 카스텔라집을 찾아낸 동생을 칭찬해 주었다. 곽지 해수욕장은 빵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가는 길이 차도라 위험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내리고 보니 하늘도 바다도 파란색이었다. 막내의 흐릿한 프로필 사진이 마음에 걸려 바다를 배경으로 근사한 사진을 찍어주고 싶던 참이었다. 나는 사진작가라도 된 것 마냥 동생에게 이런저런 포즈를 요구했다. 내가 찍은 사진은 대부분이 막내의 옆모습 아니면 뒷모습이었다. 기가 막히게 파란 배경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나름 분위기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내는 프로필 사진을 바꾸지 않았다. 내심 서운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놀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뚜벅이 신세에 빨리 출발하지 않으면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숙소에서 약속 장소까지는 만 원이 조금 넘게 나왔다. 가는 길이 산길이라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겁이 났다. 만나기로 한 곳은 카페였다. 정작 가보니 ‘이런 데 카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스산했다. 라떼로 저녁을 때울 요량이었는데 차마 카페 문을 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작가님의 차가 주차된 곳으로 갔다.

 

작가님의 차는 바퀴가 큰 빨간색 지프차였다. 같이 사진을 찍기로 한 두 팀이 나타나자 우리는 숲 속으로 들어갔다. 왜 그 지프차를 몰아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지형이었다. 아스팔트로 닦이지 않은 울퉁불퉁한 흙길이었다. 내려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가 나오긴 할까?’ 의심스러웠다. 작가님이 차 뒤에 싣고 온 조명을 설치하시니 그나마 좀 밝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게다가 추웠다. 차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발가락이 꽁꽁 얼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팠다. 개인 샷 2장, 같이 온 일행들끼리 찍는 단체 샷 2장, 라이트 페인팅으로 글자를 그려 찍는 사진 1장을 찍는다고 했다. 우리는 총 10명이었다. 이 많은 사람이 다 찍으려면 한참 걸릴 텐데 까마득했다. 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셀카를 찍으며 놀고 있으라고 했지만 다들 추워서 금세 흥미를 잃고 말았다.

 

막내가 크고 나서 가장 많은 스킨십을 한 날이 그날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몸을 손바닥으로 비벼주었다. 차례가 다가오고 사진을 찍을 때는 외투를 벗었다. 추위에 욕지기가 절로 나왔다. 작가님이 색다른 포즈를 취하고 싶으면 말해 달라고 했는데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무난한 포즈로 찍을래요.” 대답했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일어서서 한 컷, 앉아서 한 컷을 빠르게 찍었다. 둘이 같이 찍을 때는 외투를 입었다. 차마 겉옷을 벗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겨울 컨셉으로 찍자.”라고 했다. 덜덜덜 떨다가 촬영은 끝이 났다. 어쩌다 고개를 올려다보았는데 별이 그렇게 선명하고 촘촘하게 박힌 하늘은 처음이었다. 작가님이 북두칠성과 오리온자리를 라이트로 쏘면서 설명해 주었다. 겨울철을 대표하는 별은 시리우스라고도 알려주었다. 낭만적인 밤이었다. 추운 것만 빼면!

 

리우스가 빛나던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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