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패셔니스타
멋있으면 다 패셔니스타야.
며칠 전 연보라색 셔츠를 입었다. 몸에 꼭 맞는 핏이 부담스러워서 항상 그 위에 짙은 회색 조끼를 걸쳤었는데 그날은 그냥 셔츠만 입고 싶었다. 색깔이 맘에 들어 3년 전에 산 셔츠였다. 나는 통이 넓은 검은색 바지에 하얀색 러닝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셔츠와 깔 맞춤을 한 것은 아닌데 지하철도 보라색 노선을 탔다. 광화문역 2번 출구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정독도서관 역에 내렸다. 나는 요새 ‘라디오엠’이라는 카페에 자주 간다. 우리 모임의 아지트가 그 카페 2층에 있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도착해 중문이 달린 방 테이블 위에 잽싸게 가방을 던져놓았다. 우리 자리라고 ‘찜꽁’해놓은 것이다. 1층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올라와 척추를 바로 세워 앉았다. 힘을 풀면 셔츠 앞이 울퉁불퉁해져서 그 사이로 속살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괜히 이 옷을 입었나?’ 후회가 밀려오려던 찰나에 노르키님과 루씨님이 차례로 들어오셨다. “와, 오늘 너무 화사해 보여요.”, “완전히 퍼스널 칼라인데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괜히 점잔을 빼면서 “감사해요.” 하고 말았다.
나는 자기 전에 항상 내일 입을 옷을 미리 정해놓는다. 가지고 있는 옷을 머릿속으로 전부 끄집어 내 매치해 본다. 그래봐야 옷장 두 칸이 전부다. 부피가 큰 니트류 한 칸, 그 외 티셔츠류와 바지류 한 칸. 나는 옷을 좋아하면서도 환경을 생각하고,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쇼핑하는 일은 내게 있을 수 없다. 옷은 닳고 해질 때까지 입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가지고 있는 옷은 죄 유행을 잘 타지 않는 무난한 아이템들뿐이다. 그래도 매번 똑같이 입으면 재미가 없다. 니트 하나에 바지를 입어보기도 하고 치마를 걸쳐보기도 한다. 안에 셔츠를 받치기도 하고 아예 벗어서 목도리처럼 둘러매기도 한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다음날 입을 옷이 그려지지 않으면 잠이 오질 않는다. 이부자리를 벗어나 옷장 앞에 쪼그려 앉는다. 그때부터 나만의 패션쇼가 시작된다. 잘 개켜져 있는 옷을 이것저것 꺼내어 입어본다. 마음이 정해져야 편안해져서 다시 누울 수 있다. 나는 안 그런 척하면서 패션에 민감한 편이다.
색감이 중요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니트 중 원색에 가까운 파란색 니트가 있다. 나는 그 니트를 꼭 검은색이나 회색 하의 아니면 베이지색 하의와 함께 입는다. 색이 연한 청바지와는 그나마 매치가 되지만 색이 진한 청바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색이 부딪혀서 튄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옷의 전체적인 색감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그날은 왠지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어 진다. 검은색은 만능이긴 하지만 베스트는 아닐 때가 많다. 내 피부색엔 파란색 계열이 잘 어울린다. 반지는 금반지보단 은반지를 낀다. 웜톤이니 쿨톤이니 하는 것에 얽매여 색을 제한하고 싶진 않지만 확실히 손이 가는 색은 쿨톤 계열의 색이다. 파란색을 좋아하다 보니 스타일도 피부도 그에 맞춰진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내게 안 받는 색이라는 이유로 좋아하는 색을 피하지 않는다. 입다 보면 다 소화할 수 있다는 게 또 내 개똥 같은 철학 중 하나다.
요즘엔 사이즈가 큰 옷도 멋있게 나온다. 한 십 년쯤 전엔 일부러 사이즈가 작은 옷을 구매했다. 그러고선 옷에 몸을 구겨 넣었다. 라지 사이즈의 옷을 입으면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여성스럽다.’라는 말은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내 몸을 조였다. 밥도 안 먹었는데 가스가 차서 배나 골반이 아픈 일이 부지기수였다. 여름엔 궁둥이가 다 보이는 치마나 바지를 입고 다녔다. 섹시해 보이기 위해서 겨울에도 살이 보이는 얇은 스타킹을 신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은 나를 아프게 했다. 날이 추워지면 오들오들 떨었다. 윗니 아랫니를 딱딱 부딪히면서도 예뻐 보이고 싶은 걸 포기하지 못했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게도 멋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연보라색 셔츠를 입은 날 노르키님은 내게 “누런콩님은 패션에 관심 많아요?” 하고 물어보았다. 패션에 대한 내 애정을 들킨 건 처음이었다. 다들 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입는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니었다. 나는 사원증마저도 머리를 굴려서 스타일링한다. 회색 줄이라서 갈색 가죽을 달았다. 그 위에 내 MBTI가 적혀있는 바람에 다들 웃고 말았지만 그건 철저히 계산된 내 패션이었다. 노르키님의 질문에 신이 나서 나는 카페에서 나와 광화문역까지 걷는 동안 종알종알 떠들었다. “저는 옷이 많은 건 아닌데 옷을 좋아해요.”, “이것저것 매치하는 걸 좋아해서 패션 유튜브도 많이 봐요.” 다음 인터뷰가 잡히면 연보라 셔츠에 코랄 립스틱을 발라보라고 조언해 준 루씨님도, 숨겨둔 내 관심사에 관심을 가져 준 노르키님도 고마웠다. 그들이 있어 나는 오늘도 이렇게 망설임 없이 글을 쓴다.
옷 잘 입는 멋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갈수록 멋있어지고 싶다. 아니, 지금도 좀 멋있는 것 같다. 나 좀 패셔니스타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