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동 우리집은 17평이었다. 다 큰 어른 넷에 아이 두 명이 살기엔 좀 좁았다. 그때는 부산에서 사촌 언니들이 서울까지 올라와 같이 지냈다. 방 세 개 중 하나를 언니들과 내가 썼다. 초등학교 6학년도 안 됐던 나는 내 공간이 없다는 게 늘 불만이었다. 걸핏하면 언니들에게 “여기 우리집이야!” 소리치곤 했다. 중국에 가기 전까진 그 집에 살았다. 1층엔 고깃집, 2층엔 PC방이 자리한 상가주택 3층. 학교까지는 뛰어서 5분 거리였다. 엄마는 골목 끝 큰 마트에서 일했다. 엄마가 일하던 마트 앞 사거리만 건너면 망원동이었다. 보리 이모와 순희 이모도 거기 살았다.
나와 내 동생은 동네 이모들 손에서도 컸다. 초등학교 저학년 땐 보리 이모네 언니, 오빠와 꼭 같이 등교했다. 가끔은 혼자 가고 싶다고 떼를 썼으나 통하지 않았다. 엄마가 집을 비우면 우유배달을 하던 순희 이모가 우리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돌아다녔다. 나는 이모 뒤에 타는 것을 좋아했다. 주말이면 순희 이모네서 잤다. 이모네에는 다람쥐, 오리, 병아리, 고양이가 있었다. 엄마가 기함해서 집에는 들여놓지 못하는 동물들을 맘껏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중국으로 이사 갔을 땐 보리 이모네가 엄마의 친정이었다. 가끔가다 한국에 들어오면 보리 이모네에 묵었다. 이모는 우리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기꺼이 집을 내주었다. 영등포 집으로 들어가기까지는 한 달이 걸렸는데 그동안 외할머니가 계신 대구까지 내려가지 말고 그냥 이모네에 있으라고 한 것이다. 두 식구 밥을 차리는 그 한 달 동안 이모는 눈치 한 번 준 적 없다. 아빠의 장례식 때도 제일 먼저 달려와 아빠 영정사진을 챙겨준 건 보리 이모네 언니였다.
오늘은 초등학교 때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여전히 합정동에 살고 있었다. 지하철역 8번 출구에서 만나 길을 따라 ‘카페꼼마’로 갔다. 예전에 식구들과 복닥복닥 살던 집과 자주 가던 놀이터가 보였다. “바뀐 것 같은데 바뀌지 않은 것도 같아.” 내가 살던 동네는 들어선 상가만 조금씩 달라졌을 뿐 그대로인 듯했다. 친구는 나를 독특한 아이로 기억하고 있었다. 흐물흐물한 인간의 전형이 된 나는 어릴 때 주관이 꽤 뚜렷했었나 보다. 거의 10년 만에 만난 친구였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나를 잊지 않고 연락해 준 친구에게 한없이 고마웠다.
내가 중국으로 전학 가고 우리는 오랫동안 국제 편지를 주고받았다. 서로에게 많은 별명을 붙여주고 서로를 ‘파란색을 좋아하는 아이, 초록색을 좋아하는 아이’라는 식으로 특징지어 주었다. 나는 한때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의 최강창민을 좋아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친구가 거대한 최강창민 브로마이드bromide 하나와 그의 사진 한 보따리를 부쳐준 것이다. 친구가 보내준 편지로 나는 사춘기 시절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어릴 때 기억은 아직도 내게 큰 힘이 된다.
우리는 저녁으로 멕시코 음식을 먹었다. 엄마가 합정동에 갈 거면 맛있는 것 좀 사 오라고 한 바람에 망원 시장엘 들렀다. 추워진 날씨에 몸을 움츠리면서 걷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보리 이모네 언니였다. “언니!”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언니는 잠깐 주춤하다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선 나를 와락 껴안았다. 이산가족 상봉이 따로 없었다. 이내 보리 이모도 왔다. 이모는 “아이구야, 한 번 안아보자”하며 나를 꽉 안았다. 언니는 기다리고 있으니 언제든 놀러 오라며 다시 나를 꼭 끌어안았다. 아빠 장례식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언니를 본 지도 10년이 다 되어간다. 언니가 내 친언니인 것만 같았다. 눈물이 찔끔 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긴 세월을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오늘만큼 행복한 적이 있었나 싶다. 합정동 그 집은 작지만 따뜻한 곳이었다. 언니와 이모들과 내 최초의 친구가 있던 곳.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추워서 이가 달달 부딪혔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 돌아오는 길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훈기마저 감도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