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에세이
(상)에 이어서
두 분은 그 뜻을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우산을 접고 들어가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금방 다시 나왔다. 차 안으로 물이 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옷이 젖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신발이 더러워져서일까. 사람이 많아서일까. 나는 사장님 두 분이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손에 쥐어진 흰색 쪽지를 보고 금방 깨달았다. 대기 번호 56번.
우리는 살면서 삶의 많은 순간에 불공평과 불합리를 경험하지만, 그 누구도 대우받지 못하는 가장 대중적인 곳이 있다. 이런 맛집이 그런 곳이다. 가게 사장님께서 또 한 번 자신의 자본력을 사용해 방송사에 연락한 것이 아니라면 흰색 번호표 없이 앞질러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은 방송 관계자 외에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평등하고 차라리 아무도 대우받지 못하는 이런 맛집의 북적거리는 분위기도 조금은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와 이설씨는 주변을 관찰하는 일은 그만 멈추고 메뉴를 먼저 정하기로 했다. 메뉴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데 이름도 국숫집이고, 칼국수를 먹으러 들어왔는데 칼국수가 없었다. 칼국수가 유명하던데 유일한 칼국수 메뉴는 ‘육개장 칼국수’ 뿐이었다. 나는 육개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육개장의 어두운 느낌도 있지만, 나는 매운 음식을 그다지 잘 먹지 못한다. 이 식당이 티비에 나왔던 것도 몰랐고, 심지어 칼국수를 팔지 않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들어왔다니, 한강 물이 몇 시간 뒤에 넘칠 것이라는 미래를 예언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온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47번 대기번호 들어오세요.”
사람은 때때로 원하는 것이 없는데 굳이 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차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면 그것은 원래 내가 원했던 것처럼 감쪽같아진다. 겉으로는 포장했어도 사실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차선'은 참 재밌는 단어다. 단어를 정의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헤이, 잠깐 눈 감아봐 내가 뭘 선택할 건데 어쨌든 네가 눈을 뜨면 그걸 받아들이는 거야. 오케이?", 후회하기 싫어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원하지 않던 것을 원하는 것으로 생각을 조정하는 일은 이처럼 간단하고 매우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나는 칼국수가 아닌 다른 음식들을 주문하며 이곳에서 그런 음식들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칼국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속이고 주문을 했다.
창문 밖에 내리는 폭우를 배경으로 비빔국수와 육전이 차려졌다. 나는 이 음식들을 내가 원하던 것이라고, 이 육전을 먹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던 것이라고 생각을 조정하고 있었다. ‘차선’을 선택하는 일도 자주 하게 되면 그것은 습관이 된다. 눈만 한 번 깜빡이면 내가 원치 않던 것을 내가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데, 사실은 최고의 선택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때가 많다는 것이다. 원하는 것에 집착하기보다 삶의 태도를 유연하게 유지할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고 생각지 못한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내가 원하지 않던 것을 그렇게나 쉽게 '마치 내가 원했던 것'으로 자신을 스스로 속일 수 있다면, 내가 원하던 것이 정말 내가 원한 것은 맞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최선과 차선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그 둘은 사실 아무런 차이가 없다. 끝내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최선이나 차선 따위가 아니라 그저 ‘선택’이라는 행동 자체에 있는 것이다.
유연한 삶의 태도는 행운을 불러들이는 방법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런 괜찮은 비빔국수와 육전을 두고 하는 말이었나 보다. 이 메뉴를 고른 것, 이 식당에 들어온 것, 대기 번호 47번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 것 모두 괜찮은 선택이었다. 사실 오늘 쓰려고 했던 주제는 ‘팔당댐’이었다. 팔당댐을 보러 가는 도중 들린 칼국수 집에서 칼국수를 먹지 못한 서러움에 글의 주제로 선택했던 것인데, 나로서는 차선의 선택이었다. 유연한 삶의 태도는 이처럼 생각지 못한 영감을 허락한다는 것을 또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