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란 누구인가. 동생들에겐 양보를, 부모에겐 공양과 부양을, 큰딸의 다른 이름은 ‘살림 밑천’이었다. K-팝, K-드라마, K-민주주의, K-방역 등 뭇 ‘K-’ 중에서도 최고는 ‘K-장녀’라는 말이 있지 앉은가! 그런 언니가, 천생 싸움이란 모르는 줄 알았던 언니가 내 몫을 챙기기 시작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요즈음 싸움 이야기를 하려면 <오징어게임>을 보지 않고서 대화에 낄 수가 없다. 그리고 이 갈등과 경쟁 서사의 또 다른 축에 ‘스우파’ <스트릿우먼파이터>가 있다. 둘 다 라운드마다 탈락자가 생기는 서바이벌 경쟁을 다루고 있다. <오징어게임> 속 경쟁은 홉스가 말한 인간세(世를) 묘사하듯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이다. 한 라운드에서 탈락자가 발생할 때마다 우승자가 가져갈 수 있는 상금은 1억씩 올라간다. 여기서 탈락은 더 이상 게임을 할 수 없는 상태, 즉 죽는 것이다. 상금은 탈락한 이들의 ‘목숨값’이다. 한 사람의 마지막 숨에 1억, 한 사람의 비명에 또 1억. 그렇게 456명이 참가한 게임에서 우승한 주인공은 455명의 목숨값 455억과 살아남은 자신의 목숨값 1억을 더해 456억을 갖게 된다. 잔혹하고 무자비한 <오징어게임>은 그다지 새로운 방식의 경쟁은 아니다. 오히려 게임 규칙에 따라 이긴 자는 살고 진 자는 죽는다는 진행이 공정해 보이기까지 한다.
‘복불복 게임’으로 유명했던 <1박 2일>에서 아메리카노와 까나리액젓 중 무엇을 고르냐에 따라 실내취침과 야외취침으로 갈라져야 할 때, 아메리카노를 골라 시원하게 마신 후 외치던 말, “나만 아니면 돼!”. 모두가 한 팀이라도 개인전일 때는 나만 아니면 되고 맨 마지막, 꼴찌만 아니면 됐다. <오징어게임> 역시 매 라운드 ‘나만 아니면 돼’ 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만 아니면 되는 이 싸움, 옆에 앉아 있는 애의 머리를 하나씩 밟고 올라서야 좀 더 잘난 내가 될 수 있는 싸움, 우리 사회 불문율의 규칙이 아니었나. 글로벌 신자유주의 시대, 전 세계에서 <오징어게임>이 인기를 끄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가 굴러가는 방식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스트릿우먼파이터>의 경쟁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경쟁과 비슷한 듯하지만, 들여다볼수록 다른 감도의 경합을 만나게 된다. 이 경쟁에도 승자와 패자는 있다. 모두가 ‘목숨 걸고’ 경쟁하지만 탈락자 중 누구도 죽지 않는다. ‘악마의 편집’으로 유명한 방송사는 프로그램 초기부터 갈등을 부각시켰다. 자신이 이길 수 있는 댄서를 약자로 지목하여 배틀을 벌이는 ‘약자 지목 배틀’이 그 시작이었다. 약자로 지목한 댄서에게 ‘노 리스펙(No Respect)’ 사인을 보내면 지목받은 댄서는 ‘No Respect’이 적힌 스티커를 몸에 붙인다. 파이트존에 등장한 47명의 댄서들의 몸에 붙은 스티커는 가시적으로 <스트릿우먼파이터>가 ‘노 리스펙 배틀’임을 보여주었다. 대놓고 서로 존중하지 말고 싸우라고 깔아놓은 이 판에서 여성 댄서들은 어딘가 다른 싸움을 보여주었다.
홀리뱅 크루의 수장 허니제이와 코카앤버터의 리헤이는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부터 자극적인 예고편의 주인공이었다. 스승과 제자 관계로 오랜 시간 함께했지만,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5년간 마주치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런 둘이 약자 지목 배틀에서 맞붙게 된다. 프리스타일로 춤을 추던 둘은 두 번이나 같은 부분에서 똑같은 춤을 춰서 모두를 놀라게 한다. 연락 한 번 않고 지내던 둘은 한 마디 말도 없이 각자의 춤에 몰두했고, 무대가 끝나자마자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시 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런가하면 왁킹의 최강자 라치카의 피넛과 프라우드우먼의 립제이의 배틀 역시 시작은 살벌했다. 한 걸음에 눈앞까지 훅 다가오는 도발과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시하는 더 도발적인 리액션. 이 살벌함은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고 한 곡에 동시에 춤을 추는 순간 시너지로 바뀌었다. 배틀에서 주고받는 공격과 응수는 서로의 댄스 시퀀스를 다 알고 있는 듯 어느 순간 둘의 퍼포먼스로 변했고 음악이 끝나자마자 댄서들은 물론 파이트저지까지 신발을 무대에 던지며 ‘리스펙’을 표한다. <스트리트우먼파이터>의 맏언니인 프라우드우먼의 모니카는 둘째언니 허니제이를 약자로 지목한다. 그렇게 허니제이는 스테이지로 올라서며 말한다.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 배틀의 승패에 따라 크루에 감점이 생기는 긴장되는 순간에도 두 언니는 함께 무대를 만든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즐기며 춤춘다.
팀 대항 미션에서도 치열하지만 훈훈한 경쟁이 이어진다. 라치카는 프로그램에서 댄서들이 경쟁을 하고 있지만 모든 댄서를, 모든 여성을 응원한다며 비욘세의 <Run the World(Girls)>에 맞춰 춤을 추고 각 크루의 상징 깃발을 높이 든다. 깃발 중에는 이전 라운드에서 탈락한 크루의 깃발도 있었다. 더 나아가 각 라운드마다 배틀의 내용을 알리는 종이를 무대에서 찢어버리며 ‘파이트’가 아니라 ‘페스티벌’을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매 라운드 모든 경쟁 모두 우리가 이제껏 본 적 없는 리스펙이 있는 경쟁, 서로를 존중하며 싸우는 ‘리스펙 배틀’만이 존재했다.
<스프릿우먼파이터>가 리스펙하는 경쟁을 하는 동안 드러난 것은 여성 댄서 그 자체다. 여성 댄서들은 가수의 백업댄서로 무대 뒤쪽에 서거나, 무대 앞에 서게 되더라도 여러 장르의 춤을 출 수 없이 몸매가 부각되는 소위 ‘섹시 댄스’를 추도록 요구받았다. 브레이크 댄스, 힙합 댄스 등 일부 장르는 남성 댄서의 전유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여성 힙합 뮤지션 제시의 신곡 안무를 짜는 미션이 주어졌을 때 프라우드우먼의 모니카는 ‘여기서도 뒤에 서야 하냐’며 댄서로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가수의 백업댄서로 만들어버리는 미션에 문제를 제기한다. 대중 평가와 파이트 저지의 심사로 순위가 결정되지만 홀리뱅의 허니제이는 “우리가 잘하는 걸 하자.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걸”이라며 크루 멤버들의 용기를 돋운다. 미션이 시작되고 각 크루는 백업댄서로서의 춤이 아니라 한 명이 가수의 역할을 맡아 다른 멤버들과 함께 춤을 추는 안무를 선보였다. 라운드 이후 공개된 제시의 신곡 뮤직비디오에는 순위와 상관없이 모든 크루가 등장하며 각 크루가 센터에서 자신들의 춤을 춘다. 곡의 후반부에야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제시는 그렇게 댄서들과 함께 메인 자리를 나눠가진다. 어느 누구도 누군가에 뒤에 서게 하지 않겠다는, 여성 힙합 가수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여성 댄서들. 한국 음악신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남성과 같이 춤을 추라는 맨 오브 우먼 미션에서 여성 댄서들은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적 세계관마저 깨부순다. 모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남자와 여자가 구분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거나 하이힐을 신은 남자 댄서와 춤을 추고 여성 댄서들은 드랙킹이 되어 드랙퀸의 내레이션“Clearly I am not a fat ass, I am active brain And lip smacking peach deep(난 단순히 도톰한 엉덩이만은 아니야, 나는 사고할 수 있는 뇌이고 입맛 다실 만큼의 분홍빛 입으로 심오한 얘기도 할 수 있어)”에 맞추어 춤을 춘다.
<스트릿우먼파이터>에서 1위를 한 홀리뱅의 허니제이는 수상 소감으로 “대한민국 댄서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너무 멋진 댄서들 많고 여기 참여한 크루들 말고도 다른 댄서들 많고 여러분들 자부심 가져도 돼요.”라고 말하며 자신들은 무대 뒤에만 서는 존재가 아님을, 댄서로서 무대를 장악할 준비가 이미 되어 있음을 말한다. 경쟁의 마지막 순간까지 승리의 기쁨보다 함께하는 즐거움과 서로를 향한 리스펙을 보여주었다.
또 하나의 서바이벌 경쟁 프로그램인 <슈퍼밴드>는 시즌 2 참가자를 모집하며 남성만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시즌 1에서도 남성 참가자들만 등장했던 프로그램이었기에 참여자 모집을 두고 성차별 논란이 일었고 제작진은 여성 지원자도 받겠다고 결정했다. 그렇게 파워 드러머, 록 보컬, 헤비메탈 기타리스트 등 많은 여성 뮤지션이 등장하여 밴드의 ‘프론트맨’으로 우뚝 섰고 여성 뮤지션으로만 구성된 팀이 최종 결승에 오르기도 했다.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가 총상금 1억 원을 걸고 참가자들이 상금을 받을 때 <스트릿우먼파이터> 우승 크루는 트로피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같은 방송사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임에도 우승 혜택의 큰 차이가 나자 팬들이 문제제기를 했고 방송사는 상금 오천만 원을 우승 혜택으로 급히 추가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여자들이 많이 있는 회의는 시간이 배로 든다고, 여성에게는 골프클럽 회원권을 판매할 수 없다고, 여자가 일하면 아이는 누가 보고 살림은 누가 하냐고……. 그렇게 많은 여성의 말은 가로막혔고 무대에 오를 수 기회를 빼앗겼다. 여자들도 충분히 싸울 수 있다. 그 싸움이 지금까지 알던 모습과 많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당황스러운가?
잘 봐, 이게 여자들 싸움이다.
*이 글은 『함께가는 예술인』123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