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 도시 여자들>
어둑어둑한 저녁, 무거운 짐이 있어 택시에 탔다. 뭐라 부르기는 애매한 질문이 선을 넘어 운전석에서 뒷자리에 앉은 내게로 온다.
“아가씨 나이가 몇 살이에요? 결혼은 했는가?”
대답은 했지만 이어지는 질문에는 어물거리며 창밖만 보았다. 택시 기사는 대화 같은 혼잣말을 하다가 라디오를 켰다. ‘처음부터 대답하지 말 걸, 괜히 말했다……’ 후회를 꿀꺽꿀꺽 몇 번이고 삼키며 속을 끓이다 집 근처 대로변에 택시를 세웠다. 계산하려 카드를 기사에게 건네고선 차 문을 반쯤 열고 한 쪽 다리를 바깥에 내놓은 채 비장하게 소리쳤다.
“다음부터 젊은 여자가 타거든 나이고 결혼이고 묻지 마세요!”
‘쾅’ 소리가 나도록 택시 문을 세게 닫았다. 해코지가 이어질까 비장한 뒷모습을 유지한 채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형형색색 이름도 독특한 캔맥주가 진열된 냉장고 앞에 선다. 4캔에 만 원! 많은 캔맥주 중 4개를 고르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라거냐 에일이냐 IPA냐, 그날의 기분과 컨디션 그리고 함께 먹을 음식에 따라 맥주를 고른다. 한참 냉장고와 눈싸움을 하다 마침내 캔맥주 4개를 품에 안고 계산대로 향한다.
“봉투 드릴까요?”
“아니요.”
가방에 넣고 다니는 작은 에코백을 꺼낸다. 기가 막히게 캔맥주 4개가 딱 들어간다. 누군가 에코백을 가지고 다니면 더 짐이 되지 않느냐고 묻기에 캔맥주 4개가 앙증맞게 들어간 사진 한 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논란을 불식시켰다. 골목길을 걸어 무사히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나와 드디어 캔맥주를 딴다. 깡! 역전 만루 홈런을 치는 배트 소리보다 더 속 시원한 소리!
맥주를 마시며 택시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한다. ‘그때 대답하지 말 걸’, ‘그런 거 묻지 말라고 더 일찍 말할 걸’, ‘그래도 그렇게 말한 건 처음이네’, ‘속 시원하긴 하네, 내가 택시 문을 꽝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닫다니!’ 하며 캔맥주 하나를 더 딴다. 깡!
퇴근길에 사는 술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오늘 하루 힘든 일이 있었거나 기분이 좋거나 어려운 일을 해냈거나. 무슨 일이든 나에게 위로와 격려를 전하기 위해 술을 산다. 맥주 한 병에 추억과, 막걸리 한 병에 사랑과, 소주 한 병에 쓸쓸함…….
‘한잔하다’가 하나의 단어인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술 한 잔 하자’, ‘차 한 잔 하자’라고 얼마나 말했으면 ‘한잔하다’가 ‘간단하게 한 차례 차나 술 따위를 마시다’는 뜻으로 표준국어대사전 표제어가 되었을까. 그만큼 우리는 한잔할 일이 참으로 많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축하를 할 때도 한잔하자고 말한다.
TVING 오리지널 드라마 <술꾼 도시 여자들>은 한 술집에서 내건 ‘평생 술 공짜’라는 엄청난 상품을 따내기 위해 뭉쳤다가 10년이 넘도록 술잔을 부딪치고 있는 3명의 여성이 주인공이다. 종이접기 유튜버 지구, 방송국 작가 소희, 요가 강사 지연은 각자의 일에 몰입해 있다가도 저녁이면 이런 저런 이유로 만나 소주잔이고 맥주잔이고 잔을 부딪치며 외친다.
“적시자, 취하자, 미치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셋은 모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지구는 고등학교 교사였고 소희는 출판사 직원, 지연은 대기업 구내식당 영양사로 일했다. 누구보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열심히 일했던 셋이 어쩌다 직업을 바꾸게 되었을까.
막내 여교사가 회식 자리에서 사근사근하게 교장 선생님 옆에 앉아 술을 따르지 않아서, 수영장이 있는 호텔에서 보자는 회장님의 ‘은밀한 초대’에 친구들을 데려가 ‘대환장파티’를 만들어서, 친구를 호텔로 부른 대기업 회장의 자서전을 출판할 수 없다며 걸쭉하게 육두문자를 날리며 깽판을 부려서.
여성이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기 참 힘들다. 면접 때부터 이른바 ‘남결출’, 남자친구가 있는지, 결혼은 언제 할 것인지, 출산은 할 것인지에 대답해야 한다. 직장 동료와 상사는 결혼과 출산을 응원하면서도 워킹맘은 반기지 않는다. 일하면 남편은 어쩌고 아이는 어쩌고 출근하냐는 말을 듣고, 일을 하지 않으면 왜 일하지 않고 집에서 노냐는 말을 듣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게 바로 ‘일해라 절해라’ 하는 상황인 걸까. 그런데 절하는 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
<술꾼 도시 여자들>에서 소희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지구와 지연은 소희를 대신해 문상객을 받고 맞절을 한다. 소희도 친구들의 도움으로 상주 역할을 겨우 해낸다. 발인을 앞두고 장례지도사는 관을 들 사람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소희는 친구들이 있다고 하지만 장례지도사는 관은 남자만 들 수 있다며 친구들이 문상객 받는 것 정도야 괜찮지만 관은 들 수 없다고 말한다. 지구와 지연은 친구 소희의 아버지 관을 들지 못했다.
필자도 내 뜻대로 절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장례사가 입관식을 하니 장손이 앞으로 나오라 하여 필자가 나갔더니 여자애는 안 된다며 막아섰다. 손자 중에 남자가 없는지, 없으면 친척 중에라도 남자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은 ‘이 아이가 장손인데 당신들이 무슨 이유로 막느냐’고 따졌고 겨우 할머니의 마지막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끝끝내 할머니의 영정 사진은 필자의 오촌 당숙이 들었다. 장례식 내내 꿰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심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산 우리 자매는 얌전히 빈소에 있어야 하고,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한 친척들이 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가수 이랑은 친언니의 장례식을 직접 준비했다. 상주를 맡은 이랑은 여성 상복인 치마저고리가 아닌 양복 정장을 입고 흰 머리핀 대신 완장을 팔뚝에 찼다. 예쁘고 반짝이는 것을 좋아했던 언니를 위해 장례식장은 온갖 장신구와 무대 의상으로 꾸몄다. 언니가 속해 있던 댄스 팀은 장례식장에서 군무를 추기도 했다. 누가 ‘일해라 절해라’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제 하고 싶은 대로 절한 것이 더욱 언니를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어릴 때는 여자애답게 얌전히 놀라 해서 운동장에 나가지 않고 교실 뒤 바닥에 둘러앉아 공기놀이를 했다. 조금 커서는 교실 뒤에서 교복 치마 걷어 올리고 말뚝박기를 했더니 여학생들이 위험하게 뭐하는 거냐고 혼났다. 여자애들이 공부를 더 잘해서 남자애들 기를 죽인다고 혼나고, 여직원이 되어서 애교도 좀 부리고 여성스럽게 옷 입으라며 지적도 받았다. 도대체 여자애, 여학생이, 여자가 뭘 어째야 한단 말인가.
매우 ‘여성스럽게’ 캔맥주를 따면서 생각해본다. 여성의 분노와 우울은 개인의 단편적인 감정이 아니다. 요구르트에 빨대 꽂아 마시고 패스트푸드점에서 탄산음료 리필해다 마실 때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구나. 이렇게 술 권하는 사회에서 술꾼 도시 여자가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버티겠는가.
보들레르는 술이든 시든 무엇이든 좋아하는 것에 “취하라”고 했다. 이건 명령문이다. <술꾼 도시 여자들>은 “취하자”고 한다. 듣는 이에게 같이 행동할 것은 제안하는 청유문이다. 나도 취할 테니 함께 취하자고 술잔을 드는 것이다. 그 술잔에 나의 술잔을 부딪치며 외친다. 적시자, 취하자, 미치자!
* 이 글은 호가든 <보타닉>, 스퀴즈 브루어리 <말표 청포도 에일>, 플래티넘맥주 <술고래(라이트 에일)>, 세븐브로이 <한강>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 이 글은 『함께가는 예술인』 124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