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작년 이맘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양쪽 부모님 모두 구순을 넘기시도록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계셨다. 네 노인들이 다 구순을 넘기며 짱짱한 목소리로 살고 계셨다.
그중 가장 연세가 많으신 아버님이었지만, 온전한 육체와 온전한 정신 또한 으뜸이셨다. 세상에 감사하며 즐기고 살고 계신 분이셨다.
미국은 팬데믹에서 벗어나 많은 조치들에서 자유로워졌지만 , 한국은 그때까지도 엄격하게 팬데믹의 규칙이 지켜지고 있었다.
와이프와 자식들, 그리고 손자들이 있는 미국을 들어오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어 놓고 일주일만 기다리면 됐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가족들은 그렇게 아버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원하던 대로 착착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에 들어오시기 일주일 전에 아버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단 소식을 들었다. 그저 가벼운 일이 일어난 줄 알았다.
고관절에 금이 갔는지, 고통을 참는 건 타고난 윤 씨 집안의 수장답게 아버님도 그러실 줄 알았는데, 아버님이 직접 엠블런스를 불러 병원에 가셨단 말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급기야 수술에 들어간다는 말에 큰 아주버님이 가장 먼저 한국으로 들어가셨다. 미국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아들들이 하나 둘 한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 년이라는 긴 가장의 실직으로 인해, 가장 힘든 시기에 우리의 형편으로는 비행기를 끊을 여유가 되질 않았다.
매일 하루가 멀다 하게 돈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고, 부부사이는 남보다도 못한 관계에 치닫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식은 그래도 들어가야 되는 게 마땅하다 생각하고, 급하게 돈을 구해 남편만 어찌어찌해서 들여보냈다.
비행기 표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는 연말 성수기에 간신히 표를 구했다. 지구 여기저기를 돌아 남편이 한국으로 들어갔다.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아버님은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계셨다.
의사는 수술을 처음엔 만류했었다.
수술을 하려고 보니 이미 몸속에서는 암이 퍼질 대로 퍼져 있었단다. 아버님은 전립선암 말기단계였다.
아버님 자신만 몰랐을 뿐, 몸은 이미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얘기해 주고 있었다. 나이 든 몸이 수술을 버텨내지 못할 거라고 의사가 재차 말했지만, 삶의 연장보다 당장의 고통이 더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수술은 다행히도 아버님을 다시 살려놓았지만, 중환자실에서 홀로 버티셔야 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아버님은 언제쯤 자신이 퇴원할 수 있냐고 하루에 겨우 짧게 허락된 면회를 하러 온 자식들에게 물어보셨단다.
어머니를 끝으로 두 며느리와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 자신들의 일을 미룬 채 속속 한국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자 그렇게 많은 대식구들이 들어갔다. 우리 식구들을 제외하고....
일주일이 지나고 돌아갔던 가족들이 또다시 자신들의 일터인 미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편도 일주일을 채우고 돌아왔다.
살아계실 때 얼굴이라도 보고 온 게 다행이라고는 말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랬을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아버지를 두고 오는 자식들의 심정은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만 95세의 아버님은 다행히 기력을 회복하시고, 시이모님이 계신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여전히 자신이 암환자라는 걸 까마득히 모르신 채로 말이다.
그렇게 요양원에 누워계시다 수술로 인한 면역력 저하로 폐렴을 극복하지 못하시고, 그 해를 넘기고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 이른 봄날에 끊어놓은 비행기를 그대로 남긴 채 , 삼 개월을 더 계시다 결국 돌아가셨다.
그 날밤 남편은 짐승 같은 울음으로 소리를 마구마구 질러댔다. 못난 자식의 절규는 나는 이해를 하고도 남았지만, 그는 나에게도 못난 남편이었다.
이번에도 남편만 나가야 했다.
왜 부모의 죽음에 망설여야 했을까? 쪽팔린 현실이었다.
그렇게 나는 시아버지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못된 며느리가 되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조용히 원망 섞인 위로와 명복을 빌었을 뿐이었다.
노인들의 죽음은 아무도 모른다.
오늘 건강하다고 해서 내일도 건강하다는 걸 짐작을 할 수가 없다. 다만 감사하게도 아버님은 당신이 암이란 사실을 모르시고 돌아가셨다.
생전에 나와 남편 사이와 다르게 사돈끼리는 사이가 좋았다.
아버지는 아버님과 함께 일본여행을 하기도 하고, 엄마는 어머님이 한국에 오시면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곤 했으니까..
엄마와 아버지가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사위를 만났다. 구순이 넘은 네 노인 중 나이 순대로 아버님이 먼저 떠나셨다. 만 구십오 세를 사시고 가셨다.
영정사진 속 아버님은 웃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