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
“무슨 설거지를 그렇게 오래 해. 지긋지긋하다 너.”
성규는 수윤의 뒤에 서서 한숨을 쏟아냈다. 그럴만했다. 밥그릇과 국그릇 두 개, 수저와 젓가락 두벌, 작은 접시 두 개를 수윤은 삼십 분이 넘도록 닦고 또 닦고 있었다. 수윤의 손가락 끝이 세로로 쪼글쪼글하게 불어나 있었다. 그러나 성규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윤은 밥그릇을 계속, 닦고 또 닦았다.
“씨발년. 미친년”
성규가 상스러운 욕을 나지막하고도 부드럽게 입 밖으로 내뱉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힌 방문의 진동이 수윤의 손이 담긴 설거지통 안으로 전해졌고, 가득 담긴 물의 표면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 느낌이 너무나 좋아 수윤은 일부러 안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흐.”
수윤은 소리를 내지 않고 입을 옆으로 살짝 벌리며 웃었다. 설거지통 안을 젓던 손가락으로 물을 튕겨내자 뺨 위로 물이 튀어 찰싹 붙었다. 쪼글쪼글한 손가락은 이미 끝이 하얗게 불어나 살아있는 사람의 살갗이라기보다 죽은 생선이 마지막으로 내어 보이는 비늘 같아 보였다. 어쩌면 수윤 자신의 피부도 그렇게 되길 바랐는지 모른다. 수윤은 이미 시간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려 거실 한가운데에 달린 나무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8시 20분. 이제 도서관으로 출근해야 할 시간이었다. 수윤은 설거지통에서 손을 천천히 빼 옷에 대충 물기를 닦았다. 그릇은 물속에 그대로 두었다. 그게 그릇에는 더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친정 아빠의 손을 잡고 수영을 배우러 다녔다. 엄마처럼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면 물을 알아야 한다고 아빠가 우긴 일이었다. 처음엔 어떻게 해서 숨을 쉬고 팔을 젓는 방법을 배웠는지 너무 어려서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러다 한 달쯤 다녔을까. 어린 수윤은 물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너를 처음 수영장에 데리고 갔을 때, 나는 널 초대한 인디언 마을의 추장이 된 것 같이 느껴졌어. 신비한 세계로 내 딸을 데리고 가는 것만 같았지. 거긴 분명 다른 세상이니까.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오직 숨을 쉬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니까는.”
아빠가 초대했던 새로운 세계. 락스 냄새가 머리를 어지럽게 하고 사람들의 체모가 촌스러운 하늘색 타일 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그곳.
“얼굴을 물속에 반만 담그고 음, 하고 숨을 내쉬고 오른쪽으로 살짝 얼굴을 돌려 콧구멍만 내밀며 입으로 물을 밀며 뱉어요, 파!”
여섯 살 수윤이 자그마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숨을 쉴 때마다 아빠가 입을 벌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을 5초, 10초 간격으로 보았을 때, 수윤은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물에서 나오지 않더라도 저 사람은 나를 데리러 물로 뛰어들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래도 부드러운 물살은 늘 턱 끝에 오락가락하며 어린 수윤의 솜털을 간지럽혔다. 마치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이. 25 미터의 풀장이 하늘색 타일로 막혀 있지만 않다면 그 느낌을 쫓아 앞으로, 앞으로 더 나갈 수도 있다고 수윤은 생각했다. 팔을 앞으로 쭉 늘어트린 채, 무언가를 잡으러 간다고 생각하라는 코치의 말에 수윤은 사람들의 부유물이 둥둥 떠다녀 시야마저 흐릿한 물 안에서 기억에도 담지 못했던 엄마를 잡으러 손을 내밀었다.
엄마는 수윤을 낳고 일 년 뒤, 수윤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뗄 무렵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봄날 쑥을 캐러 강둑에 나갔다가 발이 미끄러져 강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턱받이에 아직 침을 젤젤 흘리던 수윤을 두고 어쩌면 그렇게 허망이 떠나갈 수 있냐며 아빠는 눈물도 나오지 않고 오직 기가 막히기만 했다고 그랬다. 어린 수윤은 수영할 때마다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을 눈앞에 그리며 잡는 시늉을 했다. 한 발이 미끄러져 물에 막 빠지려는 찰나의 엄마는 젊고 예뻤으며 봄날 쑥 빛의 예쁜 치마를 입고 웃고 있었다. 그러나 잡으려고 하는 엄마의 환영은 잡히지 않았고 손가락 사이로 물이 스며들다 빠져나가는 그 반복적인 느낌만이 있을 뿐이었다.
수윤은 초등학생이 되어 학교 수영부에 들어가 운동을 좀 더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수영 대회 때마다 아빠가 커다랗고 파란 타월을 들고 수윤의 뒤를 따라다니며 응원을 해주었고 기특하게도 곧잘 1등을 했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중요한 대회가 있던 어느 날 수윤의 다리 사이로 뜨끈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초경이었다. 수윤 자신은 그것이 초경 인지도, 무엇인지도 몰랐다. 가랑이 사이로 흘러나온 핏줄기가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끼어갈 무렵, 그걸 본 남자 코치가 질색하며 너는 어서 탈의실로 들어가라고 혼을 냈다. 수윤은 그날로 다시는 수영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들어가면 또 쫓겨날 것 같았다.
탈의실로 쫓겨난 4학년 수윤은 수건을 가랑이에 돌돌 말아 끼고는 걷지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바들바들 떨었다. 청소하던 아줌마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아이를 겨우 데리고 나와 눈을 흘기며 아빠에게 넘겼다.
“애가 생리가 터진 것 같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