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가을이 왔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인가? 단풍을 보러 등산하는 계절인가? 쓸쓸함의 대명사 트렌치코트의 계절인가?(키가 180cm를 넘지 않아 입을 수 없다.) 어떤 감성도 가을이 될 수 있지만 내게 가장 와닿는 가을은, 가을은 이별의 계절 같다.
오행(목·화·토·금·수)중 가을은 금(金)에 해당한다. 숙살지기(사물을 죽이고 만물의 성장을 멈추게 함)의 계절, 쌀쌀한 기운, 애매한 열매는 떨어져 죽게 하고 단단하고 건강한 열매만 붙어있게끔 하는 가을은 선택의 계절, 결단력의 계절, 이별의 계절.
내 사주를 보면 경(庚) 금이 하나, 유(酉) 금이 하나, 여덟 개의 자리에 오행 중 금이 두 개나 있어 (경금과 을목이 붙어있으면 을목이 경금처럼 바뀐다는 이야기가 있어 경금이 두 개인 사람, 그래서 금이 세 개인 사람으로도 볼 수 있다.)‘금 다자’에 해당한다. 사주를 볼 줄 알기 이전에 사주를 보러 점쟁이를 찾아가면 나는 외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외로워서 외로운 게 아니라…
1. 학교를 다닐 때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스물넷 다 돼서 부모님과 트러블이 생겨 출가를 해야 할 나이에 반년간 가출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영어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나의 딱한 사정을 봐주셔서 영어학원 점장님께서 내게 “우리 집에서 지내. 빈방이 하나 있다. 괜찮아.” 하셨다. 나는 그때부터 쉬는 때 없이 일주일 내내 아르바이트를 3개를 하며 돈을 벌었다. 투탕카맨이 아니고 쓰리랑카맨이었다. 점장님께 미안한 마음에, 때마다 저녁을 샀다. 선물을 샀다. 달라고 하지 않으셨던 월세를 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며 점장님께서 원하는 게 생겼다. “주말에 일 하는 거 그만두고 특정종교-여기에 와서 일 좀 도와라. 일손이 좀 필요하네.” 얹혀사는 입장에 거절이 어려웠다. 월급이 줄었다. 마음은 조급해지고 점장님은 별거 아닌 이유로 화를 내시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도 탈출이 필요해 나는 많은 사람들을 끊어내려고 그 일 년 안에 전화번호를 몇 번이나 바꾸었을까. 지낼 곳이 생겨서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가족과 서로 깊은 대화와 화해를 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일 년쯤 지나 내 바뀐 번호를 어떻게 알아내셨을까 점장님께 전화가 왔다. 그때는 미안했어. 시간이 괜찮으면 얼굴 한번 볼까? “………하하ㅎㅎ 별일 없으시죠?” ’ 대답이 없는 것도 대답이라는 걸 알지?’ 그렇게 전화를 끊고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점장님은 그때 ‘머리털 검은 짐승은 받아주는 게 아니다.’라고 생각하셨을까?
2. 다시 사주 이야기를 하자면 인·의·예·지·신, 차례로 사랑·정의·예의·지혜·믿음이다. 이 중에서 나는 예의가 가장 발달해 있어서 겉으로만 봤을 때 예의가 바른 사람처럼 보인다. 인간의 적절한 행동을 규정하는 내면화된 예의범절 같은 것… ‘지금 대화에서 이 단어가 적절한가?’ ‘우리 관계에서 이 대화 주제가 적절한가?’ ‘이 행동이 타인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사람들은 눈치가 빠르고 예민하다. 개인적으로는 피곤하다. 사람들이 다 나 같지 않고 너 같지 않은데 조금이라도 스스로가 규정한 범주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끊어낸다.
친구들과 펜션에 놀러 갔다. 산 좋고 물 좋고 푸른 새벽에는 새소리 들리고. 좋은 술과 음식이 빠질 수 없다. 술이 등장하면 꼭 누구는 취하는 사람이 있다. 입버릇처럼 “취하면 재미없으니까 적당히 처먹어.” 했지만 그래도 취할 사람은 취한다. 친구 하나와 의견이 약간 달랐는데 그 친구는 술이 문제였던 걸까? 원래 그런 사람일까? 물리적으로 강함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펜션 앞 나무 데크에 침을 뱉었다. 인·의·예·지·신 중에 예의가 가장 중요한 나는 휴지 몇 장을 뜯어 그 가래침을 닦아 휴지통에 버렸다.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꽤 좋아했던 친구였는데. 인연이 깊고 같이 해 온 기간이 있는데. ‘산책을 가자.’고 했다. 방에서 자던 후배가 잠을 자지 않고 다 듣고 있었는지 저도 같이 갈래요 했다. 플라스틱 커피 컵에 보드카를 나눠 따르고 마시면서 새소리가 좋다. 날씨가 좋다. 헛소리를 하면서 산책로를 한 시간쯤 걸었다. 다시 펜션에 도착해서 ‘데크에 침 뱉은 행위’ 하나를 보고 꼴 보기 싫어서 부랄 친구를 끊어내야겠다고 생각한 스스로가 너무 야박하고 마음이 아파 조금 울었다. 다음 날 아침 운전해서 집으로 가는 길 데크침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잘 들어갔나? ………괜찮지?” 얘야, 잘못한 사람은 잘못했다 미안하다 먼저 해야지, 내가 잘못했지만 그 정도로는 우리 사이 괜찮냐고 먼저 물어보는 인간이 어딨니. 넌 정말 끝인가 보다. “괜찮지 인마ㅋㅋㅋ너도 운전 조심해라.” 다음날부터 그 친구 전화는 받지 않았다.
3.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구가 있었다. 6개월에 한 번만. 6개월에 한 번만 만나야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친구였을 거다. 언제부턴가 자꾸 연락이 왔다. 술을 마시러 가자. 드라이브를 가자. 놀러를 가자. 나는 먼저 연락해서 놀자고 하지는 않는 mbti / 집에 혼자 있는 게 좋은 I – 90% 인간인데, 또 불러내면 귀찮아하면서도 나가는 인간이라 놀자고 하면 다 나갔다. 자주 만나면 만날 때마다 친구는 실수를 했다. 단어와 대화 내용을 고르지 않았다.
3-1 “독립운동가들은 정말 대단해. 그런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나면 울컥울컥 해. 나는 독립운동 같은 거 할 수 있을까? 아마 했을 것 같다.” “절대 못한다. 네가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서 독립운동을 한다고 생각해? 네가 회사를 다녀 본 적 없이 속 편한 소리 한다.” “대단한 사람이어야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좋은 사람, 안 한 사람은 안 좋은 사람으로 이분법으로 구별을 하자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은 소속감이나 국가가 개인보다 더 큰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들이 울컥해 나서서 독립운동을 하고, 개인과 가족이 더 중요한 사람은 안 하고 그런 거지. 잘잘못이 있는 게 아니지 이제 이 이야기 그만하자 됐어.” “그 순간이 안 돼봐서 그렇지 말이 쉽다. 뭔 독립운동이야.”
3-2. “이 회사가 나한테 맞는지 모르겠다. 진짜 앞으로 뭐 해 먹고살아야 하냐…” “너도 공부해ㅋㅋㅋ공무원 짱이잖아” “니부터 합격하고 말해라.”
최종적으로는 전화상으로 저 문장을 듣고 이 관계도 고장이 났다고 생각했다. 배려와 존중이 없는, 어쩌면 진심으로 미래를 걱정하는 친구에게 속 편하게 공부나 하고 있는 내가 ‘공부나 해’ 하고 별 일 아니라는 듯 뱉은 말이나, 그 말에 니부터 합격하고 말하라는 공격적인 문장이나.
다음날부터는 이 친구 전화도 받지 않았다. 받지 않았지만 헤어진 연인처럼 일주일간 전화도 오고 문자도 왔다.
- 왜 전화를 안 받는데? -
- 뭔데 왜 그러지? -
- 갑자기 왜 지랄인데? -
이렇게 떠나보낸 친구, 모임, 사람들이 되게 많다. 국토대장정 모임, 동아리 모임, 대학교 친구들, 초등학교 동창회, 어디 어디 무슨 모임이다 뭐 어쩌고 모임이다. 그래서 나는 걔 요새 뭐 하고 산대? 의 ‘걔’를 항상 맡고 있다. 그 선배 요새 뭐 해요? 배선배 요새 뭐 하는데요? 배선배는 거꾸로 해도 배선배.
이렇게 많은 이별을 겪었지만, 여전히 헤어지는 방법을 몰라서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진다. 떠날 때 굳이 한 명 한 명 메시지 보내면서 이제 우리 그만 만나요~ 고마웠어요~ 이게 더 웃긴 것 같아 그냥 죽은 사람처럼 사라진다.
사주는 그냥 재미로... 나는 외로운 사람이라는 점쟁이의 말이 정답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누가 나를 외롭게 해서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외롭게 한다. 어쩌면 정답일 수도 있겠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눈에 걸면 눈걸이. 사주는 재미로!
옛날에 쓴 시가 갑자기 생각났다.
길거리에 버리고 온 이름이 너무 많다
돌이켜보면 밟고 걸어온 곳 모두 무덤
쌓고 비우고
쌓고 비우고
작디 작은 내 그릇이
모두 비워질 때
나 그때 이곳 떠나며
가지려고 한 적 없다고
미소 짓고 눈 맞추리라
배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