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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자 Jan 02. 2020

엄마, 나도 망고 정도는 살 수 있어.

정말 큰 망고를 먹고 

"엄마, 나 쌀이랑 수분크림 좀 보내줘."


누가 들으면 참 어처구니없는 말일 수도 있겠네, 생각해보니. 나의 본가는 논과 저수지를 끼고 있다. 평생 옆집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도정해주시는 쌀만 먹었더니 당최 서울에서 사 먹는 쌀은 맛이 없다. 수분크림은 어머니께서 직원 할인(화장품 가게 직원은 아니다.) 50%를 받을 수 있어 지난달부터 쓰고 있다. 뭐 변명은 이 정도. 아무튼 그래서 엄마가 집으로 택배를 부쳤다.


택배 상자를 여니 수분크림과 세부 여행에서 사 온 과자 두 봉지가 있고, 마트에서 파는 1.5kg짜리 쌀 한 봉지가 있고, 뜬금없이 커다란 망고가 하나 있다. 전화를 건다.


"엄마 쌀은 뭐고, 망고는 뭐야?"


"아니, 할머니한테 전화했더니 도정한 쌀이 다 떨어졌대. 지난번에 받은 건 벌써 다 먹었거든. 그래서 그냥 사서 보냈어. 망고는 너 좋아하니까."


"그럼 그냥 보내지 말지 그랬어. 내가 사 먹으면 되는데. 나는 앱으로 시키니까 무겁게 들고 올 필요도 없어. 망고도.. 엄마 나 이제 망고 사 먹을 만큼은 벌어. 안 보내도 돼."


"근데 안 사 먹을 거잖아."


"..."


성인이 된 이후, 나는 악착같이 벌고 아끼며 살았다. 돈 따위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소박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렇게 돈에 얽매일 수가 없었다. 백 원 이백 원 따져가다 형편없는 20대 초반을 보내버렸다. 술자리도 밥약속도 거절해가며. 인생이 비참하다고 느낀 어느 순간부터 급속도로 일상이 변하고, 지금의 나는 매달 카드값에 충격을 받는 보통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6천원이나 하는 과일은 못 사 먹겠다. 시장에 가면 포도가 3천원인데, 귤이 한 봉지에 천원인데 하면서. 근데 나는 포도랑 귤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웬만한 과일은 손이 잘 안 간다. 억지로 억지로 먹는 타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어 못 먹는 과일은 망고, 아보카도, 체리. 이마트 앱에서 무료배송 4만원에 결제비를 맞히려 테트리스마냥 천원 이천원 담다 보면 비싼 거 한 가지 정도 살 여유가 있다. 만원짜리 하나 뭘 살까. 망고가 6000원, 체리는 9900원. 그리고 냉동육류도 9900원. 냉동고기는 한 통 사면 몇 달은 먹으니까 고기를 산다. 버는 게 늘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엄마는 이런 나를 잘 아는 거겠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엄마는 "아니, 냉장고에 뭐가 이렇게 없니?"

그럼 내가 "없긴 뭐가 없어. 어제 장 본 건데. 냉장고에 자리 없으니까 자꾸 뭐 사줄 생각 하지 말어."

-실제로 나는 외식을 꺼리기 때문에 냉장고가 항상 가득 차있다.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제발 소고기도 좀 사 먹고, 과일도 좀 사 먹어라. 삼촌한테 전화해서 한약도 지어먹고, 그 뭐냐 직구 같은 거 해서 영양제도 좀 사 먹어."

"아유, 내가 알아서 할게. 나 잘해 먹고 잘 살아. 때깔 좋아."


엄마가 가면 냉장고를 열어본다. 역시 손가락 디딜 틈도 없이 가득 차있군. 엄마 눈에는 필터 같은 게 껴있나 보다. 냉장고가 비어 보이는 필터. 딸이 말라 보이는 필터. 집이 지저분해 보이는 필터.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인형 뽑기처럼 나오려다가도 속으로 톡 하고 떨어지기 일쑤라 오늘도 사진으로 대체한다.


"엄마, 이 망고 진짜 맛있다. 먹어본 망고 중에 제일 크고 달아. 태국에서 먹은 것보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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