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좋아하는 우리 엄마
요즘 승규가 유치원에서 태양계 행성을 배우고 있다.
해왕성 (Neptune) 태양계의 여덟 번째 행성. 대기층은 수소와 헬륨, 메탄으로 이루어져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 4개의 고리를 갖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예진이가 아는 척을 하고 싶었던지 순서대로 영어 이름을 읽기 시작하다가 Neptune(해왕성)에서 막혔다.
"네 엘피르? 네엘르프?"
엄마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예진이를 혼냈다.
"아니, 아무리 승규가 한글을 몰라도 그렇지 '날파리'를 그렇게 혀를 굴려서 알려주면 승규가 제대로 알겠니? 제대로 '날! 파! 리!' 또박또박 읽어줘라."
나랑 눈이 마주친 예진이는 눈물을 흘려가며 한참을 웃었다.
몇 년 전쯤 이런 일도 있었다.
승규가 한참 아장아장 걸을 때였는데, 낮에 느닷없이 정수기 필터 교체하는 아저씨가 오셨다.
보통은 하루 전쯤 먼저 연락을 주시는데, 그날은 아무 예고 없이 초인종부터 누르고 오신 거였다.
정수기 필터를 모두 교체하고 사인을 하면서 물었다.
"지난번에는 미리 전화를 주시고 오셨는데, 오늘은 그냥 오셨네요?"
"아, 어제 제가 집으로 전화드렸어요. 어머님께서 전화를 받으셔서 오늘 오후에 오시라고 하셔서 왔거든요."
"네? 아, 그랬네요. 제가 엄마한테 얘기를 못 들었나 보네요."
아저씨를 보내고 나서 엄마에게 물었다.
"정수기 아저씨가 온다고 했으면 나한테 전해줬어야지. 다음부터는 그런 전화 오면 꼭 알려줘."
"알았다."
그러고 끝이었다.
자기 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어제저녁이 지나서 엄마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정균이(내 남동생, 엄마의 아들) 친구 중에 종수가 누구나?"
"몰라. 왜?"
"아니, 아까 종수가 전화해서 내일 집으로 온다고 하던데."
"종수가 누구지? 정균이 친구가 집으로 온대? 밖에서 만날 텐데?"
"모르겠다. 아무튼 종수가 내일 온다던데."
그 종수의 정체가 바로 정수기 아저씨였다.
아저씨가 자기를 정수기 관리기사라고 소개했을 거고 엄마는 종수라고 들으셨던 거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보통 엄마는 드라마 속의 이야기를 현실처럼 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생각나서 혼자서 이불속에서 얼마나 킥킥대고 웃었는지.
노인이 되어가는 것은 말귀가 어두워지는 건가보다.
평소 의사소통에는 큰 무리가 없으신데 가끔 앞뒤 문맥을 무시하고 머릿속에 있는 말만 하시거나
-이럴 때 나는 우리 엄마 또 직진만 한다고 표현한다- 다른 정보를 말씀드려도 계속하던 이야기만 하실 때도 있다.
요즘엔 창밖을 보면서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낙엽을 쓸고 계시곤 하는데 볼 때마다 계속 그 이야기만 하신다.
경비아저씨가 저렇게 힘든데 낙엽을 빗자루로 쓰는 게 잘못되었다는 거다.
내가 그래서 아까는 낙엽을 치울 때 기계를 쓰더라는 이야기를 옆에서 하면 그렇지 그래그래 하고 대답만 하시고 다시 빗자루로 저 많은걸 언제 다 쓸려고 저러시냐며 같은 이야기만 단어를 바꾸어 계속 반복하신다.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큰 본능이 아닐까.
코로나로 난리가 나기 이전에 요양보호사님이 집에 오셨는데 거의 대부분의 일이 엄마와 대화하시는 거였고, 나도 꼭 같이 오래오래 이야기를 해달라고 특별히 부탁드렸다.
나를 표현하는 일, 내 마음을 드러내는 일, 내가 주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
엄마에겐 말하는 것이 아마도 그런 일일 테니까, 나는 오늘도 조금 더 들어주려고 노력하고 기록으로 남기려고 노력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