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비 Mar 27. 2024

캡틴 아메리카가 그려진 명함을 본 적이 있나요?

뻔한 영업을 뻔하지 않게 하는 방법

어느 거래처를 들어갔는데 원장이 나를 알은 체를 했다.

'어? 처음 보는데 날 어떻게 알지? 설마 나는 솔로를 본 건가?'

하면서 원장실 의자에 앉았는데, 등산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등산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원장님께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은 없다, 아마 다른 영업 사원과 헷갈리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원장이 작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 다른 회사 영업사원의 명함이었다. 지폐 한 장 크기 정도되는 그 명함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ㅇㅇ제약 신입사원 김ㅁㅁ입니다.

1) 원장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제일 빨리 달려가는 영업사원이 되겠습니다.
2) 조금 서툴더라도 정직하고 우직하게 일하는 영업사원이 되겠습니다.
3) 주말마다 원장님의 골프 메이트가 되어드리겠습니다.

    * 해당 영업사원을 특정할 우려가 있어 문구는 임의로 지어냈습니다.

그리고 구석에는 캡틴 아메리카에 자기 얼굴을 합성한 사진이 붙어있었다.




감탄했다. 문구가 인상적이어서는 아니었다. 고객의 부름에 빨리 응답하겠다는 것, 정직하게 일하겠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을 갖고 차별화를 하기란 어렵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마다가스카르섬 남부에 사는 소수민족의 전통춤을 제일 잘 추는 사람이 되는 건 어렵지 않다. 대한민국에 그 춤을 출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구를 제일 잘 하는 사람이 되는 건 훨씬 어렵다. 축구는 개나 소나 다 하기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제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함이나 신속함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이고, 수치화가 가능하며, 나만 갖고 있는 장점을 내세우는 게 더 좋다.


주말마다 골프를 같이 쳐드리겠다는 문구도 썩 좋지는 않다. 의사들 중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긴 하다. 따라서 골프에 대해 아는 게 많다면 원장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유대를 쌓기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다. 의사는 하나의 직업이고, 모든 직업인들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다. 영업의 포커스는 거기에 맞춰져야 한다. 우리 제품을 쓰면 어떻게 병원이 흥하고, 어떻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영업사원은 골프 메이트가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원장이 이 문구에 혹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주말마다 원장과 골프를 치겠다고? 그럼 여자 친구는 언제 만나? 장가는 언제 가? 취미 활동은 언제 해? 돈은? 한달에 300만원 받으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라운딩을 나갈 꺼야? 설마 원장이 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를 감탄시켰던 건 그 영업사원의 순수한 열정과 실행력이었다. 나도 저런 걸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영업사원과 의사의 관계는 비즈니스 파트너다. 그러니까 친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적은 의사와 친구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분이 아무 쓸모가 없는 건 아니다. 비즈니스적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어느 정도의 친분 관계가 쌓여야 한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면 믿을 수가 없고, 믿음이 없이는 비즈니스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려면 나를 보여주어야 한다. 내가 살아온 삶,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 내가 즐겨하는 취미, 나의 MBTI 등. ㅇㅇ제약 영업사원이라는 껍데기 속에 숨겨진 나 자신을 먼저 보여줄 때, 의사도 하얀 의사 가운 속에 숨겨진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런데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동네 형과 동생 관계라면, 우리가 만난 장소가 동네 호프집이라면 달랐을 것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 수평적이고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는 원장실이고 나는 영업사원이며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은 의사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채 1분도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대화는 지극히 피상적일 수 밖에 없다. 오늘 처음 만난 ㅇㅇ제약 영업사원이 대뜸 "안녕하세요, 원장님? 원장님께서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꿈과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이 있어야 목표를 갖고 매일 노력하며 살아갈 수 있고, 사랑이 있어야 고단한 인생길에서 겪게 되는 기쁨과 슬픔들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래서 나도 저런 걸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1) 나는 솔로에 나간 얘기를 적어보면 어떨까? 요즘 제일 핫한 프로그램인데 관심을 끌기에 좋지 않을까? 간호사들 중에서도 이 프로그램 보는 사람이 많을 테고.

2) 작가로 활동하고 있단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 20년 넘은 개원의들도 작가 출신 영업사원을 보는 건 처음이지 않을까?

3) 연세대학교 출신이라는 문구를 넣어보면 어떨까? 어떤 사연으로 영업을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내 꿈과 인생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못했다. 무서워서 그랬다. 내가 짠 문구와 디자인을 원장이 보고 원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두려웠다. "이거 뭐에요? 지금 나랑 장난해요?"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못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걸 했다가 비웃음을 사는 게 두려워서 남들이 가는 뻔한 길을 가길 택했다.


하지만 저 영업사원은 했다. 문구는 뻔하고, 캡틴 아메리카에 자기 얼굴을 합성한 사진은 조악했지만 그래도 했다. 웃음거리가 될 걸 무릅쓰고 남들이 하지 않는 행동을 했다. 그건 대단한 일이다. 그가 쓴 성실하고 빠릿빠릿하다는 문구는 분명 식상했지만, 원장들은 그 식상한 문구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개원 20년 만에 이런 걸 보는 건 처음인데?
이런 걸 만들 정도의 실행력과 열정이라면
한 번 이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볼 가치는 있겠군.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냥 비웃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원장이었다면 저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나 같은 원장이 김포 시내에 적어도 하나쯤은 더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나도 한 번 해봐야겠다. 난 작가니까! 문구는 저것보다 더 잘짤 수 있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그렇게 꼰대가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