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계란 2알
"엄마..외할머니 보고 올께 아빠 출근할때 식사 챙겨드려"
원래 잠이 많은..그래서 별명도 잠보였던 내가 가장 싫었던 것은 엄마가 시골 가는 날.
며칠동안 엄마가 집을 비우면 아빠와 동생들을 챙기는 건 내 몫이 되어버린다.
딸 넷의 맏딸.
사춘기도 티 내며 투정부리지 못했고 장녀라는 타이틀에 행동도 어른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여느 어린이들처럼 투정을 부릴 수 없는 형편에 고기 반찬은 가뭄에 콩 나듯 먹을 수 있었던 나의 시절이 있었다.
방 두칸에 큰방에선 아이들 넷이 , 그 방의 반의 반 크기에선 부모님이 주무셨던 집.
화장실은 부엌을 지나 밖으로 나가야만 했던 공용. 밤에는 무서워서 가지도 못했고 너무 급하면 엄마를 깨워야 그나마 가던 곳. 그곳에서의 나는 중학교를 다니던 꿈많은 문학소녀이자 내성적인 소심한 소녀였다.
아빠의 직업은 환경미화원.
사실 아빠는 월급 많이 받고 꽤 튼튼한 철강회사를 다녔었다.
내가 7살에 초등학교를 입학하며 엄마손을 잡고 등교를 한지 이틀째 날.
그날 저녁 우리집의 사고는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버텨내야 했던 장기 여행의 서막이었다.
연립주택에서 꽤나 잘 살고 있던 당시 방이 3개나 있던 우리집의 방 하나를 세를 주었었다.
철없는 동생은 5살. 순식간에 일어난 화상 사고. 세들어 살던 젊은 여자가 물을 끓인 솥을 욕실로 옮기는 도중 뛰어나가던 5살 천방지축 아이와 부딪히며 동생의 목 아래로 물이 쏟아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 아이를 살리려 아빠는 인천의 병원을 몇군데 돌아다니셨고 모두 가망 없다며 거절을 하였다고..
마지막 세번째 병원에서 치료를 시작했지만 어마어마한 병원비로 인해 집도, 엄마 아빠의 예물도, 나와 동생들의 돌반지도 ..거기에 아빠는 퇴직을 하여 퇴직금까지 모두 병원비로 쓰여졌다.
그렇게 우린 2년에 한번씩 전세집을 전전하며 이사를 다녔고 나는 외할머니댁에 맡겨졌으며 아빠의 직업은 환경미화원이 되어 있었다.
"아빠 너무 춥다. 오토바이 타고 갈수 있어?"
한 겨울. 중학생인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옷을 차려 입는 아빠가 걱정되어 말을 건넨다.
내 눈은 잠이 가득했고 너무 추웠으며 아빠가 빨리 나가야 다시 잘 수 있을거란 생각에 조급했던것 같다.
"금방 가~ 걱정 말구 들어가 자. 아빠가 알아서 갈께"
"아빠 가는 거 보고 잘래"
냉장고에서 달걀2알을 꺼낸다.
생 달걀을 젓가락으로 톡톡 구멍내서 2개를 마시는건 우리 아빠의 아침 식사다.
"아빠..그거 맛있어?"
"이게 은근히 속이 든든해~ 건강식이야 건강식"
추르릅 쪽쪽.. 순식간에 마셔버린 아빠는 외투를 걸치고 조용한 새벽 굉음을 내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헬맷을 쓴다. 갖다오겠다며 손을 흔들어 보이시며.
"안녕히 다녀오세요~" 말 뒤에는 '빨리 따뜻한 이불 속으로'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었다.
잠깐 자고 6시에 또 일어나야해...동생들 밥 차려주고 학교 보내고 나도 가야지...엄마가 없을땐 내가 엄마잖아!!!! 어느새 잠이 든다.
오전6시는 지금의 나에게 아이들을 등교 시키기 위해 분주한 시간이다.
30여년전 동생들을 등교시키기 위해 분주했던 그 시간과 겹친다.
그리고 그 오전 6시를 맞이하기 이전 새벽 4시가 있었다.
계란 톡톡 까는 소리와 마시던 소리, 그리고 오토바이 시동 소리.
오늘은 공교롭게도 아빠가 별이 되신지 100일하고도 3일째다.
여전히 아빠가 보고싶다. 무뚝뚝한 장녀는 유일하게 딸중에서 온전히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지만
가장 살갑지 못하고 아픈 손가락이 된것 같고..
당시 화상을 입은 셋째 동생은 아빠가 아프셨던 5년간 지극한 간호를 한 효녀다.
자다가 깬 새벽 4시는 여전히 나에겐 가장 추운 시간이자 그리움의 시간이다.
그리고 오전 6시는 여전히 분주한 엄마 모드가 되는 시간이다.
"일어나서 씻고 밥먹고 가!!!!! 밥 안먹으면 엄마 자도 되지?"
아이를 깨우는 내 목소리는 하루를 여는 알람이 되어 오늘도 집안에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