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
남들과 구분되고 많은 상황에서 일관적이고 오랫동안 지속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우리는 성격이라 부른다. 남들에게 보이는 나의 성격이든, 나만 알고 있는 나의 성격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바꾸고 싶은 성격 하나쯤은 있다. 나도 그렇고,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이런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성격은 바뀔 수 있을까?"
내가 듣는 심리학 강의 때 교수님께서 질문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에게 다시 물었다. 본인은 성격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그대로인가. 이 질문에 70퍼센트는 성격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했고, 30퍼센트는 그대로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성격은 바뀔 수 있는 것인가? 앞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성격은 바뀔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성격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여러 착각에서 온 결과이다.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보이려는 사회적 바람직성의 결과, 혹은 단점인 성격에 대한 의식적인 통제의 결과로 잠시 내 성격이 바뀌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내 말을 쉽게 풀자면, 이런 것이다. 내가 고치고 싶은 고집스러운 성격이 있다. 분명 내가 틀렸거나 잘못했다는 것을 알지만, 승부욕이나 자존심 때문에 나의 생각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과 많이 싸우고 지나고 보면 내가 후회를 엄청한다는 사실에 나는 고집스러운 성격을 바꾸고 싶어 진다. 그래서 다음에 똑같이 내가 틀렸거나 잘못한 상황이 왔을 때,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내 잘못이야, 내가 착각했었네, 미안해."라는 말을 한다. 그렇게 한 두 번 가능하다. 그리고는 내가 노력했더니 내 성격이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방비한 상황에 놓였을 때, 예를 들어, 엄청나게 피곤하거나 스트레스가 엄청 쌓여있는 상황에 쳐했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과거의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돌아가 다시 짜증 내고 화낼 것이다. 즉, 엄연히 말하면 바뀐 성격은 내가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이지 실제적으로 성격이 바뀌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잘 적응하기 위해 본래의 성격을 숨기고 가면을 쓰고 있는 것뿐이다.
성격이 바뀔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성격은 다소 선천적이고 매우 후천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모순적이지만,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 성격이 다소 선천적이라는 말은 성격은 유전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정서적 민감성의 부분이 다르다. 누군가는 9 정도의 부정적인 내용에 대해 반응한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1만의 부정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정서적인 내용에 반응하는 역치가 다른 것이다. 선천적인 차이가 더 벌어지는 이유는 1만의 부정적인 내용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의 경우 감정적으로 격렬해진 상태에서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오는데 더 시간이 오래 걸릴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성격은 다소 선천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서적 민감성은 주변의 지지, 부모님과의 애착 그리고 사회적인 도움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그렇기에 선천적으로 예민한 성격이라도 내 감정을 잘 알고 대처하는 방법을 사회적인 도움으로 후천적으로 배운다면 안정적인 성격을 지닐 수 있다. 따라서, 성격이 매우 후천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선천적이고 후천적인 노력으로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만들어진 성격을 성인기에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인간의 성격은 절대 변하지 않으니 노력할 필요 없다는 허무주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은 안 좋은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고 본인을 자책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아직, 얼마 살지 않았지만, 이미 많이 봐 왔다. 내가 너무 소심한 성격이라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꾸고 싶어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을 못 거는 성격인데 먼저 말을 걸고 싶어요. 내가 먼저 나서지 못하는 성격인데 먼저 나서고 싶어요. 등등. 흔히 말하는 아싸가 인싸가 되고 싶어 했다가 사회의 벽에 막혀 좌절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만약, 내가 그 과정을 성공했다면 지금 그 방법을 알려주는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언젠가 다시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나를 보고 나는 확신이 들었다.
성격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애쓰는 거구나. 내가 내가 아닌 성격으로 남을 대해서 나의 목적을 이룬다고 해도 나는 공허하구나. 힘들구나.
반면에, 내가 나의 성격으로 살아갈 때, 그리고 그 성격을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 살아갈 때 나는 행복하고 만족하는구나.
그러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내가 성격을 바꾸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가? 나를 위한 변화인가, 혹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변화인가. 후자라면 애쓰지 마라. 목적을 이루더라도 너는 계속해서 애써야 하는 너 자신에 혼자 피곤해지고 지칠 것이다. 그리고 공허해질 것이다. 전자라면 애써봐라. 최선을 다해서 '의식적'으로 바꿔봐라. 그래서 목적을 이룬다면 성취감이 있을 것이다. 그런 정적인 강화는 어쩌면 어느 순간 너의 성격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필자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쾌감을 경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주저앉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성격은 다소 선천적이고 매우 후천적이기에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는 변함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냥 지금의 너의 성격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런 너의 성격조차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라. 그것만으로 소소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